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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이미지 유물명 국적/시대 재질 상세보기
2535 타날문원저호 한국(韓國)
토제(土製)
경질(硬質)

용도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의례생활(儀禮生活) 상장(喪葬) 고대부장품(古代副葬品)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0038 / 000
상세설명 [정의]
철기시대에 사용되었던 토기로, 종래에는 '김해식토기(金海式土器)'로 불리웠으나 최근에는 김해식토기가 가지는 특징 중의 하나인 타날문이 강조되면서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로 지칭되고 있다.
[발달과정/역사]
김해식토기(金海式土器)는 일본학자 水野淸一 등이 김해 조개무지에서 출토된 토기를 지칭하면서 '김해식회도(金海式灰陶)'라는 용어를 붙인데서 시작되었다. 그 후에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같은 성격의 토기도 '김해식토기(金海式土器)'라 부르게 되었다. 김해 조개무지 보고서에서는 도질유청색토기, 적색소소토기, 흑갈색소소토기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도질유청색토기는 도질에 청흑색 내지 유흑색을 띠는 '須惠器'이며 '신라소(新羅燒)'라 부를 수 있는 것이고, 적색소소토기눈 야요이식토기(彌生式土器)와 유사하고 도질유청색토기와 공통점이 많으며, 흑갈색소소토기는 다른 토기에 비해 조악(粗惡)하며 원저(圓底)에 소형토기와 빗질한 것이 많다고 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김해식토기란 김해 조개무지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서 회청색 혹은 적갈색의 타날문이 있는 경질토기를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소위 '와질토기론(瓦質土器論)'이 등장되면서 김해식토기 중의 회청색경질토기는 도질토기로 고분기의 토기임이 주장되면서 점차 지명에 의한 토기명칭인 '감해식토기'라는 용어가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명칭으로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에 이 시기 토기의 대표적인 특징인 타날문을 지칭하는 의미에서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로 불려졌다. 타날문토기가 처음 붙여진 것은 해남 군곡리 조개무지 발굴보고서로 여기에서는 철기시대 토기를 크게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타날문토기 속에서 색상이나 태토에 따라 회색연질토기, 흑색연질토기, 적갈색연질토기. 회청색경질토기 등 다양하게 세분되고 있다. 여기에서 타날기법의 등장이 언제인지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춘천 중도 집자리에서는 경질무문토기와 함께 타날문토기가 등장하며 그 연대를 2세기로 보고 있으나, 중부지역의 다른 유적에서는 기원전후로 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남부지역의 김해 지내동 독널무덤에서는 경질무문토기와 함께 타날문의 적갈색연질독이 발견되어 적어도 1세기경의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고식 와질토기로 분류되는 것 중에도 이미 타날문이 등장하는 것도 1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타날문토기는 한반도 중·남부지역세어 기원전후에는 등장하였을 것으로 본다. 결국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는 종래 '김해식토기'를 대신하여 사용되는 토기 명칭이며, 경질무문토기에 이어 철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이다. 이것은 새로운 토기제조 기술, 즉 도박(陶拍)에 의한 타날문의 시문 이외에도 회전판의 사용 및 굴가마(登窯)의 채용 등에 의해 제작된 토기이다. 이 토기는 회청색의 경질토기이다. 구연부와 바닥이 결실되었으나 바닥은 원로 보인다. 동체부 전체에 타날문이 시문되어 있으며 橫條線이 넓게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체부 중상단 어깨부위에서 급격하게 오므라든다.
2534 원저호 한국(韓國)
토제(土製)
와질(瓦質)

용도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의례생활(儀禮生活) 상장(喪葬) 고대부장품(古代副葬品)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0037 / 000
상세설명 [정의]
토기(土器)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이다.
[발달과정/역사]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신석기시대 이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과거의 수렵·채집생활에서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착생활로 전환하면서 식량을 저장하고, 식수를 담아두는 용기가 필요하게 되면서 출현하였다. 처음에는 자연적인 구덩이나 풀로 만든 바구니, 목기 등을 토기 대신에 사용하였으나 점차 흙을 반죽하여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 말려서 쓰게 되는데 우연한 기회에 불에 타서 단단해진 것을 보고 토기가 발명되었다고 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토기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보통 500~1000℃이하에서 구워지지만 그 이상에서 구워진 것은 도기(陶器)라 부르는데,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나오는 유약을 바른 자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토기라 부른다. 토기는 만들기 쉬운 반면 부서지기 쉬워서 신석기시대 이래로 유적 출토품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물이다. 각 시대별로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주류를 이루며 덧띠무늬토기(隆起文土器), 단도마연(丹塗磨硏)토기, 가지무늬(彩文)토기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는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紅陶), 검은간토기(黑陶) 등이 있다. 철기시대에는 민무늬토기와 타날문토기가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각각 특징적인 토기들이 제작·사용되었다. 고구려는 중국과 가까워 그 영향을 많이 받아, 한식(漢式)계통의 회색 또는 흑회색의 납작바닥토기, 손잡이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백제토기는 승석문(繩蓆文)이 보편적으로 시문되고, 삼족기가 존재하며 납작바닥토기가 많고, 형태가 특이한 그릇받침(器臺)가 출토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신라토기는 타날문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정선된 태토에 굴가마에서 환원염으로 구웠으며 녹로를 사용하여 다량으로 생산하였다. 밀폐된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진 신라토기는 두드리면 금속성의 소리를 내는 아주 단단한 것으로 그릇의 종류로는 긴목항아리(長頸壺), 짧은목항아리(短頸壺), 굽다리접시(高杯) 등이 중심을 이룬다. 이외에도 그릇받침(器臺), 손잡이달린잔(把手附盞), 동물·배·뿔 모양의 토기들도 있다. 이 토기는 회백색의 와질토기이다. 구연은 직립하다가 약간 외반하며 바닥은 圓底인데 동체부 중단부에서 급격하게 오므라든다. 소성은 양호한 편이다. 구연부와 동체부가 일부 결실되었다.
2533 무문토기호 한국(韓國)
토제(土製)
연질(軟質)

용도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의례생활(儀禮生活) 상장(喪葬) 고대부장품(古代副葬品)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0033 / 000
상세설명 [개념]
한국 청동기시대의 토기를 일괄해서 일반적으로 '민무늬토기'하고 하나 민무늬토기(無文土器)라는 용어는 원래 과거 일본인학자등이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는 물론 간토기(磨硏土器)와도 구분하였던 용어이다. 이러한 개념을 충실히 따라서 북한에서는 청동기시대의 토기를 갈색민그릇과 간그릇으로 나누어 살피고 있지만, 남한에서는 마연(磨硏)이나 채색(彩色) 등의 표면처리 수법에 관계없이 통틀어 민무늬토기라고 한다. 민무늬토기란 문자 그대로라면 무늬가 없는 토기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토기 중 지역에 따라서는 평북 신암리토기(新岩里土器)를 비롯하여 무늬가 장식된 예가 많다. 또한 시대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남한에서 실제 사용한 예를 보면 민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의 토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B.C.3세기 이후 철기시대 후기형식의 민무늬토기, 그리고 B.C.1세기경 한대(漢代) 철기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을 때도 연전히 민무늬토기가 사용되었다. 심지어는 남한의 원삼국시대 혹은 삼국시대 전기에 타날무늬토기(打捺文土器)와 공반하는 무늬없는 토기, 예를 들어 한강유역의 중도식토기(中島式土器)를 민무늬토기로 보기도 하는데 이 경우 민무늬토기 개념이 지나치게 확대, 적용된 것으로 시대적 의미가 약해지기 때문에 곤란하다. 나아가서 민무늬토기를 시대의 표지유물(標識遺物)로 보아 청동기시대를 대신하여 사용하는 '민무늬토기시대'라는 개념은 청동기뿐만 아니라, 철기 사용기에 두루 걸쳐 지나치게 포괄하는 시대개념(時代槪念)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발달과정/역사]
대체로 본격적인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사용기가 되면 민무늬토기의 분포권은 더욱 확대되어 북으로는 송화강 유역, 남으로는 금강, 영산강 그리고 낙동강 유역뿐만 아니라 멀리 제주도까지 이른다. 우선 요하에서 압록강 하류에 이르는 지역에 있어서 비파형동검 사용기의 표지적인 토기로는 의주 미송리(美松里) 동굴유적에서 처음 확인된 미송리형토기(美松里型土器)가 있다. 전형적인 미송리형토기는 표면을 마연하고 납작 항아리 양쪽 옆에 손잡이가 달렸으며, 폭이 넓게 올라가다가 다시 안으로 오므라들면서, 동체와 목에 묶음식 대선문(帶線文)을 두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미송리 항아리형토기와 공반하는 깊은 바리에는 전 단계에 유행하였던 겹아가리가 많다. 이 지방의 미송리형토기는 다른 지방으로 퍼져 송화강 유역에서는 시투안샨쯔형(西團山子型) 등으로 지역화하여 나타난다. 나아가 대동강 유역에서는 평양 남경 출토 검은간토기를 미송리형토기로 보기도 한다. 송화강 유역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미송리형토기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시투안샨쯔형토기(西團山子型)가 초기 부여의 표지유물로 보고, 양자 사이에 나타나는 토기형식의 유사성을 들어 고조선과 부여 주민간에 교류와 친분이 있었다고 북한학자들은 주장한다. 한강 유역과 그 이남지방에는 대동강 유역의 신흥동식토기가 지역화한 가락동식토기(可樂洞式土器)가 있는데, 겹아가리의 빗금무늬가 연속적으로 시문(施文)되고, 전체 그릇 모양은 바닥이 넓어져 팽이형(角形)에서 화분형(花盆形)으로 바뀐다. 같은 한강 상류의 흔암리(欣岩里) 유적 출토토기는 구멍무늬장식의 역삼동식토기와 겹 아가리의 가락동식토기가 공반되거나 두 형식의 토기 속성이 복합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
2532 무문토기호 한국(韓國)
토제(土製)
연질(軟質)

용도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의례생활(儀禮生活) 상장(喪葬) 고대부장품(古代副葬品)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0032 / 000
상세설명 [개념]
한국 청동기시대의 토기를 일괄해서 일반적으로 '민무늬토기'하고 하나 민무늬토기(無文土器)라는 용어는 원래 과거 일본인학자등이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는 물론 간토기(磨硏土器)와도 구분하였던 용어이다. 이러한 개념을 충실히 따라서 북한에서는 청동기시대의 토기를 갈색민그릇과 간그릇으로 나누어 살피고 있지만, 남한에서는 마연(磨硏)이나 채색(彩色) 등의 표면처리 수법에 관계없이 통틀어 민무늬토기라고 한다. 민무늬토기란 문자 그대로라면 무늬가 없는 토기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토기 중 지역에 따라서는 평북 신암리토기(新岩里土器)를 비롯하여 무늬가 장식된 예가 많다. 또한 시대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남한에서 실제 사용한 예를 보면 민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의 토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B.C.3세기 이후 철기시대 후기형식의 민무늬토기, 그리고 B.C.1세기경 한대(漢代) 철기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을 때도 연전히 민무늬토기가 사용되었다. 심지어는 남한의 원삼국시대 혹은 삼국시대 전기에 타날무늬토기(打捺文土器)와 공반하는 무늬없는 토기, 예를 들어 한강유역의 중도식토기(中島式土器)를 민무늬토기로 보기도 하는데 이 경우 민무늬토기 개념이 지나치게 확대, 적용된 것으로 시대적 의미가 약해지기 때문에 곤란하다. 나아가서 민무늬토기를 시대의 표지유물(標識遺物)로 보아 청동기시대를 대신하여 사용하는 '민무늬토기시대'라는 개념은 청동기뿐만 아니라, 철기 사용기에 두루 걸쳐 지나치게 포괄하는 시대개념(時代槪念)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발달과정/역사]
대체로 본격적인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사용기가 되면 민무늬토기의 분포권은 더욱 확대되어 북으로는 송화강 유역, 남으로는 금강, 영산강 그리고 낙동강 유역뿐만 아니라 멀리 제주도까지 이른다. 우선 요하에서 압록강 하류에 이르는 지역에 있어서 비파형동검 사용기의 표지적인 토기로는 의주 미송리(美松里) 동굴유적에서 처음 확인된 미송리형토기(美松里型土器)가 있다. 전형적인 미송리형토기는 표면을 마연하고 납작 항아리 양쪽 옆에 손잡이가 달렸으며, 폭이 넓게 올라가다가 다시 안으로 오므라들면서, 동체와 목에 묶음식 대선문(帶線文)을 두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미송리 항아리형토기와 공반하는 깊은 바리에는 전 단계에 유행하였던 겹아가리가 많다. 이 지방의 미송리형토기는 다른 지방으로 퍼져 송화강 유역에서는 시투안샨쯔형(西團山子型) 등으로 지역화하여 나타난다. 나아가 대동강 유역에서는 평양 남경 출토 검은간토기를 미송리형토기로 보기도 한다. 송화강 유역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미송리형토기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시투안샨쯔형토기(西團山子型)가 초기 부여의 표지유물로 보고, 양자 사이에 나타나는 토기형식의 유사성을 들어 고조선과 부여 주민간에 교류와 친분이 있었다고 북한학자들은 주장한다. 한강 유역과 그 이남지방에는 대동강 유역의 신흥동식토기가 지역화한 가락동식토기(可樂洞式土器)가 있는데, 겹아가리의 빗금무늬가 연속적으로 시문(施文)되고, 전체 그릇 모양은 바닥이 넓어져 팽이형(角形)에서 화분형(花盆形)으로 바뀐다. 같은 한강 상류의 흔암리(欣岩里) 유적 출토토기는 구멍무늬장식의 역삼동식토기와 겹 아가리의 가락동식토기가 공반되거나 두 형식의 토기 속성이 복합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
2531 방추차 한국(韓國)
석(石)
안산암(安山岩)

용도기능 산업/생업(産業/生業) 공업(工業) 염직(染織) 방추차(방추차)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0031 / 000
상세설명 [정의]
실을 뽑을 때 사용하는 방적구의 일종.
[발달과정/역사]
섬유를 꼬아 실을 만드는 방적기구로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한국에서는 황해도 지탑리(智塔里), 강원도 오산리(鰲山里), 한강 중류 흔암리(欣巖里) 등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는데 바늘이 실에 감긴 채 출토된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 이후부터 사용된 것으로 여겨지며, 청동기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BC 5세기∼AD 6세기부터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청동기시대 이후의 것은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은 방차를 써서 삼[麻]과 같은 식물섬유를 뽑아 평직물을 짰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섬유를 꼬아 실을 만드는 방적기구로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선사시대의 가락바퀴는 원반모양, 팽이모양, 주판알모양, 공모양 등이 있다. 가락바퀴의 가운데에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고,이 구멍에 가락바퀴의 축이 될 막대를 넣고 그 축을 돌리는 방법으로 실을 고아서 뽑는데 사용한다. 재질로 보면 흙을 빚어서 구운 것, 돌로 만든 것, 또는 질그릇 조각을 갈아서 만든 것 등이 있는데 선사시대에는 주로 흙을 빚어서 구운 것이 많다. 이 가락바퀴는 회청색의 석재 방추차로 일부 결실되었다. 상, 하면 모두 고르게 마연하였으며 측면도 마연하였으며 거의 원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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