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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이미지 유물명 국적/시대 재질 상세보기
1340 토기병(土器甁) 한국(韓國)
토제(土製)
경질(硬質)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병(甁)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병(甁)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2745 / 000
상세설명 [정의]
토기(土器)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이다.
[발달과정/역사]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신석기시대 이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과거의 수렵·채집생활에서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착생활로 전환하면서 식량을 저장하고, 식수를 담아두는 용기가 필요하게 되면서 출현하였다. 긴목항아리는 신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에 이르가까지 계속 사용된다. 특히 신라와 가야에서 크게 유행하였는데, 신라의 것은 어깨목이 각을 이루며 바닥에 대(臺)가 달리는 경우가 많고 동체(胴體)에 기하학적 무늬가 있고 토우(土偶)를 붙이기도 한다. 가야(伽耶)의 것은 어깨와 목이 곡선으로 이어지며, 대가 없고 따로 만들어진 굽받침이나 높은 받침대 위에 올려진다. 무늬는 물결무늬(波狀文)가 주류를 이룬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토기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보통 500~1000℃이하에서 구워지지만 그 이상에서 구워진 것은 도기(陶器)라 부르는데,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나오는 유약을 바른 자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토기라 부른다. 토기는 만들기 쉬운 반면 부서지기 쉬어서 신석기시대 이래로 유적 출토품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물이다. 각 시대별로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주류를 이루며 덧띠무늬토기(隆起文土器), 단도마연(丹塗磨硏)토기, 가지무늬(彩文)토기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는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紅陶), 검은간토기(黑陶) 등이 있다. 철기시대에는 민무늬토기와 타날문도기가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각각 특징적인 토기들이 제작·사용되었다. 고구려는 중국과 가까워 그 영향을 많이 받아, 한식(漢式)계통의 회색 또는 흑회색의 납작바닥토기, 손잡이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백제토기는 승석문(繩蓆文)이 보편적으로 시문되고, 삼족기가 존재하며 납작바닥토기가 많고, 형태가 특이한 그릇받침(器臺)가 출토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신라토기는 타날문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정선된 태토에 굴가마에서 환원염으로 구웠으며 녹로를 사용하여 다량으로 생산하였다. 밀폐된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진 신라토기는 두드리면 금속성의 소리를 내는 아주 단단한 것으로 그릇의 종류로는 긴목항아리(長頸壺), 짧은목항아리(短頸壺), 굽다리접시(高杯) 등이 중심을 이룬다. 이 토기는 구연(口緣)은 나팔처럼 벌어졌고, 좁아진 목에 어깨로부터 벌어져 팽배해진 동체(胴體)를 이루다 좁혀져 세워진 병이다. 어깨 부분에 한 줄의 음각선(陰刻線)이 둘려 있고, 기면(器面)에 물레의 회전 자국이 나있다. 회청색을 띠며, 경질토기이다. 바닥은 평저(平底)이다. 구연(口緣)이 약간 결실되어 있다.
1339 조리(黍籬) 한국(韓國)
나무(나무)
대나무(대나무)

용도기능 식(食) 취사(炊事) 취사(炊事) 조리(조리)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737 / 000
상세설명 [정의]
쌀을 일어 돌을 걸러내는 데 쓰이는 주방용구.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가는 대오리를 국자 모양으로 결어서 만든다. 물에 담근 쌀을 일정한 방향으로 일면 쌀알이 떠오르면서 조리 안에 담기고, 무거운 돌은 밑으로 가라앉는다. 이 조리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임원경제지≫에 조리를 석미추(淅米試)라 하고, 대오리로 국자 모양으로 엮어 만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조선시대 때 이미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근래에는 철사로 엮어 만든 것이나 합성수지제품으로 만든 것이 보급되어 있다. 조리는 필요한 물질을 거르고 나쁜 것은 따로 분리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사람들은 자기 집에 복이 들기를 기원하여 조리 쌍을 엇걸어 잡아매고, 한두개의 엽전을 담아 대청이나 안방 머리에 걸어놓았다. 이를 복조리라고 불렀는데, 정월 보름이면 상인들이 붉은 실로 묶은 복조리를 들고 다니며 팔았고, 사는 쪽에서는 값을 깎지 않고 사서 1년 내내 걸어두었다.
1338 가래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산업/생업(産業/生業) 농업(農業) 파종경작(播種耕作) 가래(가래)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703 / 000
상세설명 [정의]
정지작업이나 흙을 옮기는 작업 등에서 흙을 파서 던지는 데 쓰는 농기구.
[개념]
삽을 변형시켜 만든 것으로 넓죽한 삽날에 긴 나무자루를 박고, 삽날 윗부분 좌우측에 각각 줄을 매어 사용한다. 보통 3∼5인이 사용하는데, 한 사람은 자루를 잡고, 2∼4인이 양쪽에서 줄을 잡아 당기며 작업을 한다. 삽보다 작업 능률이 높고 여러 사람이 공동작업을 할 수 있다.
[구조 및 기능]
≪훈민정음해례≫에는 '佳래[嵩]'로, ≪천일록(千一錄)≫에서는 '가내(可乃)'로, ≪해동농서(海東農書)≫에는 '험(領)'으로 표기되었다. 끝에 쇠날이 달려 있어 '堪가래', 넓적하다 하여 '넙가래'라고도 하였다. 생나무를 자루와 몸이 하나가 되도록 깎고 둥글넓적한 몸 끝에 말굽쇠 모양의 쇠날을 끼웠다. 몸 양쪽에 구멍을 뚫고 줄을 꿰었으며, 한 사람이 자루를 잡고 흙을 떠서 밀면 양쪽에서 두 사람이 그 줄을 당겨 흙을 던진다. 줄의 길이는 대체로 자루의 길이와 비슷하다. 가래질은 줄꾼 두 사람과 장부(자루)잡이 한 사람 등 모두 세 사람이 하는 '세손목 한카래'가 있고, 장부잡이 한 사람과 줄꾼 여섯 사람 등 모두 일곱 사람이 하는 '일곱목 한카래', 그리고 두 개의 가래를 연이은 것에 장부꾼 두 사람과 줄잡이 여덟 사람 등 모두 열 사람이 하는 '열목 카래' 등이 있는데, 보통은 '세손목 한카래'로 일을 한다. 흙을 떠서 옮기는 일을 '가래질'이라고 하고 가래로 떠낸 흙덩이를 '가랫밥'이라고 한다. 또, 가래를 세워 흙을 깎는 일을 '칼가래질', 논둑이나 밭둑을 깎는 일을 '후릿가래질'이라고 한다. 가래로는 소가 들어가지 못하는 진흙밭이나 물이 많이 나는 논을 갈고, 밭이랑을 일구기도 한다. 또, 흙을 떠서 던지는 데에도 쓰며, 도랑을 치고 논둑을 쌓거나 깎을 때에도 이용한다. 근래에는 집터를 닦거나 도로공사를 할 때 쓰는 일이 많은데, 쇠를 통으로 부어서 삽처럼 만들고 양 귀에 고리를 단 것이 흔하다. 남자 세 사람이 하루 6백여 평의 진흙밭을 고를 수 있다. 수명은 대체로 4, 5년이며 재래식의 무게는 2.5㎏쯤 된다.
[부분 명칭]
가래의 부분 명칭은 다음과 같다. ① 가래장부:가래의 자루와 몸. ② 군두구멍:가랫바닥의 좌우 양쪽에 뚫은 구멍으로 거기에 군두새끼를 꿴다. ③ 군두새끼:군두구멍에 꿰어서 가랫줄을 얼러 매는 가는 새끼. 흙이 묻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가죽을 쓰기도 한다. ④ 꺾쇠:가랫바닥과 날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박는 쇠못. ⑤ 군두:가래의 날을 맞추어 끼우는 넓적한 판. ⑥ 가랫바닥:가래의 몸으로 위에 긴 자루가 달리고 끝이 둥글삐죽하여 가랫날을 끼우게 된 넓적한 나무. ⑦ 각시노리:가래의 양편에 있는 군두구멍을 얼러 맨 군두새끼가 감아 돌아간 장부의 목 부분. ⑧ 게재비 구멍:가래 날개 위쪽으로 벌어진 틈으로 홈처럼 되어 있어 나무 바탕을 끼워 맞추는 자리. ⑨ 장부촉:장부의 끝. ⑩ 가랫날:가래 끝에 끼우는 쇠로서 삽 모양으로 끝이 둥글삐죽하고, 위는 가로 홈이 져서 가랫바닥의 끝이 끼게 되었으며, 양편에 꺾쇠구멍이 있다. ⑪ 살군두:가래의 날을 장부의 바닥에 얼러 매는 줄로 꺾쇠 대신 쓴다.
1337 쟁기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산업/생업(産業/生業) 농업(農業) 파종경작(播種耕作) 쟁기(쟁기)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700 / 000
상세설명 [정의]
논이나 밭을 가는 데 쓰는 데 농기구.
[유래]
쟁기라는 이름은 '잠기'에서 비롯되었다. 1553년(명종 8)에 나온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에서 '철리경지(鐵崎耕之)'를 "잠기로 가라."로 새겼고, 윤선도(尹善道)의 시조에도 "잠기연장 다스려라."라는 구절이 있다. 잠기는 본디 무기를 가리키는 '잠개'의 바뀐 말로, 예전에는 농기구를 무기로도 썼기 때문에 두 가지를 같은 말로 적었던 것이다. 잠기는 19세기 초 장기로 바뀌었으며, 오늘날의 쟁기가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쟁기는 뒤지개[掘棒]에서 비롯되어 따비를 거쳐 완성된 연장이다. 쟁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보습으로, 철제가 나오기 전에는 나무를 깎거나 돌을 갈아서 썼다. 가장 오랜 돌보습은 기원전 3000년 전반기의 유적으로 황해도 지탑리에서 나왔다. 57개 가운데 완전한 것은 22개로, 큰 것은 길이 50∼65㎝, 너비 15∼25㎝, 두께 2∼3㎝이다. 형태는 대체로 긴 타원형으로 한쪽 끝은 좁지만 반대쪽은 넓은데, 특히 좁은 날 부분에는 긁힌 흔적이 뚜렷한 것이 많다. 따라서 이들 보습은 시작되는 자루목에 줄을 걸어서 가래처럼 끌어당겨 썼으리라고 본다. 한편, 이 유적에서 피와 조가 출토되어 당시 갈이농사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벼 재배에 관한 유적은 3,500년 전 영산강 유역인 전라남도 나주군 다치면 가흥리, 2, 000∼3,000년 전의 경상남도 김해 연안리, 그리고 2,300년 전의 울산 방어진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들 지역에서도 돌보습을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원시적인 형태의 쟁기는 기원전 1000년 경의 유적인 평안북도 염주군 주의리에서 나왔다. 참나무로 만든 이 쟁기술은 지면에 평행으로 뻗어갔으며, 끝이 뾰족하고 볏밥이 뒤로 잘 넘어가도록 윗부분을 손잡이 쪽으로 비스듬하게 깎았다. 손잡이부분에 성에를 끼워박을 구멍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이를 끈으로 잡아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같은 지층에서 수레바퀴가 함께 나왔는데, 이는 소가 쟁기를 끌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중국의 경우 전국시대(기원전 403∼221) 말기의 무덤에서 철제보습이 나왔고, 1세기의 무덤인 산시성 동한묘(東漢墓) 벽화에 쟁기를 쓰는 그림이 등장하였으며, 우리 나라도 기원전 2, 3세기에 삽 따위의 철제농구를 만들었으므로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철제보습을 생산하였으리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역사 및 구조]
쟁기의 사용을 알리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 노례왕조에 나온 기록(製崎殯反藏氷庫作車乘)이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조에도 502년 쟁기를 소가 끌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쟁기나 소 부림의 시초를 알리는 것이라기보다 이의 장려 및 보급을 강조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한편, 우리 나라의 쟁기는 괭이와 함께 8세기경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일본인들은 우리의 쟁기를 부리는 기술이 매우 뛰어나다는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한 틀의 쟁기는 비교적 길고 곧게 뻗어나간 성에와 앞으로 휘우듬하게 휜 술, 그리고 성에와 술을 고정시키는 한마루로 구성된다. 숟가락처럼 생긴 술 끝에는 땅을 가는 보습이 달리고, 보습 위쪽에 갈린 흙(볏밥)을 한쪽으로 떠넘기는 볏이 있다. 한마루에는 땅을 가는 깊이에 따라 술의 각도를 조정하기 위한 구멍이 한두 개 뚫려 있다. 보습과 볏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목재이나 근래에는 철제의 한마루를 쓰기도 하고, 술바닥에 쇠판(전라
1336 거름대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산업/생업(産業/生業) 농업(農業) 파종경작(播種耕作) 기타(其他)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699 / 000
상세설명 [정의]
두엄·썩은새 또는 낙엽 같은 것을 걷어내거나 쳐내는 데 쓰는 연장.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지역에 따라 '쇠스랑'이라고도 하며, 모양이 무기인 삼지창과 비슷하여 '삼지창'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산간마을인 도계읍 신리와 인제군 인제·원통 등지에서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가지가 세 갈래로 벌어진 자연생의 물푸레나무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든다. 쇠스랑과 같은 명칭으로 불리는 것은 세 갈래로 갈라진 발이 흡사하기 때문이며, 거릿대는 발이 뻗어나가고, 쇠스랑은 굽어진 것이 차이점이다. 생김새에 따라 거릿대는 주로 앞으로 밀면서 쳐내는 기능을 하고 쇠스랑은 끌어당기는 기능이 다를 뿐이다. 가장 원시적인 농기구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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