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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이미지 유물명 국적/시대 재질 상세보기
2635 백자접시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접시(접시)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0009 / 000
상세설명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과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했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15세기경부터는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7세기경부터 주류를 이룬다. 그 외에 청자와 마찬가지로 상감백자, 철화백자 등의 종류가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백자는 청자보다 더 순수한(철분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은) 태토인 백토(高嶺土)를 이용하여 형태를 만들고 철분이 거의 포함되지 않은 무색투명의 장석질 유약을 입혀 1300℃ 이상의 고온에서 환원번조의 방식으로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냐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백자접시는 유약이 얇게 시유되어 황색의 태토가 그대로 보이며 내저면에 규석이 혼입되어 있다. 굽은 오목굽을 유약이 흘러내려 굽쪽은 부분적으로 두껍게 보인다. 외측면은 완만하게 올라가다가 구연부분에서 내반하고 있다.
2634 백자접시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접시(접시)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0008 / 000
상세설명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과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했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15세기경부터는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7세기경부터 주류를 이룬다. 그 외에 청자와 마찬가지로 상감백자, 철화백자 등의 종류가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백자는 청자보다 더 순수한(철분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은) 태토인 백토(高嶺土)를 이용하여 형태를 만들고 철분이 거의 포함되지 않은 무색투명의 장석질 유약을 입혀 1300℃ 이상의 고온에서 환원번조의 방식으로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냐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백자접시는 유약이 얇게 시유되어 황색의 태토가 그대로 보이며 내저면에 규석이 혼입되어 있다. 굽은 오목굽으로 유약이 흘러내려 굽쪽은 부분적으로 두껍게 보인다. 외측면은 완만하게 올라가다가 구연부분에서 내반하고 있다.
2633 청자접시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청자(靑磁)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접시(접시)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0007 / 000
상세설명 [정의]
청유(靑釉)를 시유(施釉)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청자(靑磁)는 철분이 극소량 들어 있는 태토 위에 철분 1~3%의 장석유(長石釉)를 바르고 환원염으로 구워 유약 속의 철분이 청록색으로 변한 자기를 말하는데, 청자색을 진하게 하기 위해서는 유약을 여러 번 두껍게 발라야 한다. 대체로 환원이 불충분하거나, 또는 불순물이 함유되거나 해서 유색(釉色)이 황녹색이나 회녹색, 때로는 산화되어 황갈색을 띤 것도 청자로 부르고 있다. 다만 구리성분[銅分]의 산화에 의한 녹유(綠釉)는 청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중국 절강성 북부의 월주요(越州窯)에서는 한대부터 원시적인 청자가 만들어졌지만 5~6세기경부터는 차츰 발전하여 제작지도 화남·화북으로 퍼져나갔으며 당나라를 거쳐 송대에는 절정을 이루어 청자요가 중국 각지에 있었다. 특히 복건성, 절강성, 광동성의 해안지역에서 많은 요지가 발견되었고 청대의 경덕진료에서는 송·명대 청자의 모조품제작이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청자의 발생은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말부터 중국 월주요에서 만든 원시청자인 고월자(古越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학설과 10세기 후반에 고려의 중앙집권화 및 신지배층의 중국도자에 대한 수요에서 청자제작이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청자는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白土)로 모양을 만들고, 철분이 소량 함유된 장석질의 유약(靑磁釉)을 입혀 1250~1300℃의 고온에서 환원번조로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불교사회와 귀족문화를 배경에 두고 있는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도 맑은 비색과 유려하고 당당한 선의 흐름을 지닌 형태, 그리고 독창적인 상감기법 및 문양을 특징으로 한다. 더욱이 고려 이전의 기명들이 대부분 의식용 그릇이었던 데 비하여 고려청자는 합(盒), 대접, 접시, 완(碗), 술잔, 병, 주전자 등과 같은 실용적인 그릇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장식용 그릇인 꽃병[화병], 연적(硯滴), 향로에는 오리, 원숭이, 사자, 혹은 참외나 석류 등의 동식물 모습을 표현했는데 매우 뛰어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매병(梅甁)은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가장 고려적인 특징을 보이는 형태이다. 소문(素文)청자는 기명의 표면에 어떠한 채색도 가미하지 않은 청자로, 정선된 흙으로 얇게 구워내기 때문에 그릇의 형태와 유약색이 뛰어난 것이 많으며 주로 청자 초기 단계에 제작되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이 청자접시는 대부분 탈색되었으나 투박한 청색의 색조가 남아 있다. 내면의 바닥이 약간의 장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눈비짐받침의 흔적이 2개 보인다. 굽 접지면 안쪽에 규석의 소토들이 보이며 외측면에 청자편이 보인다. 구연부분은 거의 수평으로 외반하여 내면에 턱이 형성되었으며 반전하여 수직의 구연을 형성하였다.
2632 청자병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청자(靑磁)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병(甁)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병(甁)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0004 / 000
상세설명 [정의]
청유(靑釉)를 시유(施釉)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청자(靑磁)는 철분이 극소량 들어 있는 태토 위에 철분 1~3%의 장석유(長石釉)를 바르고 환원염으로 구워 유약 속의 철분이 청록색으로 변한 자기를 말하는데, 청자색을 진하게 하기 위해서는 유약을 여러 번 두껍게 발라야 한다. 대체로 환원이 불충분하거나, 또는 불순물이 함유되거나 해서 유색(釉色)이 황녹색이나 회녹색, 때로는 산화되어 황갈색을 띤 것도 청자로 부르고 있다. 다만 구리성분[銅分]의 산화에 의한 녹유(綠釉)는 청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중국 절강성 북부의 월주요(越州窯)에서는 한대부터 원시적인 청자가 만들어졌지만 5~6세기경부터는 차츰 발전하여 제작지도 화남·화북으로 퍼져나갔으며 당나라를 거쳐 송대에는 절정을 이루어 청자요가 중국 각지에 있었다. 특히 복건성, 절강성, 광동성의 해안지역에서 많은 요지가 발견되었고 청대의 경덕진료에서는 송·명대 청자의 모조품제작이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청자의 발생은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말부터 중국 월주요에서 만든 원시청자인 고월자(古越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학설과 10세기 후반에 고려의 중앙집권화 및 신지배층의 중국도자에 대한 수요에서 청자제작이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청자는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白土)로 모양을 만들고, 철분이 소량 함유된 장석질의 유약(靑磁釉)을 입혀 1250~1300℃의 고온에서 환원번조로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불교사회와 귀족문화를 배경에 두고 있는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도 맑은 비색과 유려하고 당당한 선의 흐름을 지닌 형태, 그리고 독창적인 상감기법 및 문양을 특징으로 한다. 더욱이 고려 이전의 기명들이 대부분 의식용 그릇이었던 데 비하여 고려청자는 합(盒), 대접, 접시, 완(碗), 술잔, 병, 주전자 등과 같은 실용적인 그릇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장식용 그릇인 꽃병[화병], 연적(硯滴), 향로에는 오리, 원숭이, 사자, 혹은 참외나 석류 등의 동식물 모습을 표현했는데 매우 뛰어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매병(梅甁)은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가장 고려적인 특징을 보이는 형태이다. 소문(素文)청자는 기명의 표면에 어떠한 채색도 가미하지 않은 청자로, 정선된 흙으로 얇게 구워내기 때문에 그릇의 형태와 유약색이 뛰어난 것이 많으며 주로 청자 초기 단계에 제작되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이 청자병은 부분부분 탈색되어 있으나 밝은 청색의 색조가 뚜렷이 보인다. 바닥은 유약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몸통 중간부분에서 약간 위에 1조의 횡선이 있으며 이 횡선을 중심으로 파도모양의 문양이 시문되어 있다.
2631 분청인화문접시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분청(粉靑)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접시(접시)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0003 / 000
상세설명 [정의]
회색 또는회흑색 태토(胎土) 위에 백토니(白土泥)를 분장한 다음 유약을 입혀서 구워낸 자기.
[발달과정/역사]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로 고유섭(高裕燮)이 명명한 데서 유래되었다. 그릇 표면을 백토(白土)로 분장[화장]하여 전체적으로 백색을 띠며 유약을 바른 후의 색조는 회청색을 띠는 도자이다. 분청사기는 한국도자사의 큰 흐름에서 볼 때 청자의 맥락 위에 있으나 청자보다는 태토 내 철분의 함량이 적어 청자에 비해 색이 밝아지고 유약도 희어져 전체적인 색감은 밝은 회청색을 띤다. 14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중엽 사이에 생산되었고 15세기 전반 세종의 재위시기에 가장 다양하게 발전하여 전국에서 생산되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분청사기 그릇의 형태는 고려시대의 것이 대부분 계승되면서 조금씩 변화되었으며, 대접의 경우 기벽이 비교적 얇고 구연부가 밖으로 벌어진 형태가 많다. 매병은 고려매병의 당당한 형태와 뚜렷한 차이를 보여 전체적으로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S자형의 굴곡이 심해지며 구연부가 넓은 큰 항아리가 늘어난다. 특히 제기(祭器)의 경우 고려시대에서는 볼 수 없던 기형으로 조선사회의 유교적인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분청사기의 특징은 그릇 표면을 백토로 씌우는 백토분장기법과 그 무늬에 있다. 백토분장의 동기는 잘 알 수 없으나 고려 말에 철분이나 잡물이 많이 섞인 조잡한 청자가 제작되자 이러한 잡물을 감추기 위하여 백토로 분장하였으리라 추측된다. 또한 14세기 당시 중국도자가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백자로 전환하려는 시도로 표면을 백색화하려 했다고 보기도 한다. 분청인화(印花)는 점열(點列) 또는 국화문, 육가변문(六角辨文) 등의 도장으로 표면을 찍은 후 백토를 넣는 방법이므로 노동절감과 동시에 대량생산을 위한 수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인화기법도 넓은 의미로는 상감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이 분청사기접시는 완형의 접시로 구연부분을 제외한 부분은 거의 탈색되었으며, 담청색의 색조를 띤다. 내측면 바닥 중심에 두줄의 흰색 심선이 있고 그 주변으로 세줄의 심선이 있으며 완만하게 올라가는 구연부분에도 세줄의 심선이 있으며 그 사이사이에 화문이 시문되어 있다. 외측면에는 구연부 밑에 2-3줄의 심선이 불규칙적으로 형성되어 있고 규석받침흔적이 두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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