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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이미지 유물명 국적/시대 재질 상세보기
2640 청자전편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청자(靑磁)

용도기능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벽/바닥재(벽/바닥재) 전(塼)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0014 / 000
상세설명 [정의]
점토를 틀에다 찍은 다음 건조시키거나 구운 벽돌.
[발달과정/역사]
중국 은(殷)·주(周) 때에는 없었고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사용한 듯하다. 우리 나라 전을 시대별로 개관하면 삼국시대에 제작된 전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사용된 유구(遺構)의 원상이 보존된 예는 더욱 적다. 고구려의 영역 안에서 낙랑군시대의 전축분묘가 유행하여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수가 적지 않은데도 고구려에서는 전으로 고분 주체부를 축조한 일이 전혀 없다. 다만, 통구(通溝)지방의 태왕릉(太王陵)과 천추총(千秋塚)에서는 돌더미 속에서 '願太王陵 安如山固如岳(원태왕릉 안여산고여악)', '天秋萬歲永固(천추만세영고)', '保固乾坤相畢(보고건곤상필)' 등의 문자가 돋을새김된 전편이 발견된 일이 있는데 어떠한 형태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봉토의 일부에 사용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고신라시대 전의 발견례는 더욱 적다. 선덕여왕 때 양지(良志)가 전으로 작은 탑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물은 현존하지 않으며, 분묘는 고구려·백제와 달리 현실(玄室)을 마련하지 않은 원시적 구조로 전을 사용할 여지가 없다. 다만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의 일부에서는 무문전(無文塼)이 깔려 있는 유구가 발견된 일이 있다.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면 백제는 전을 사용한 예가 상당히 많다. 가장 뚜렷한 예는 공주 송산리에 있는 전축분 2기이다. 그 중 1기는 매지권(買地券)에 의하여 백제 무녕왕릉임이 밝혀져 매우 주목되었다. 송산리 제5호분에 사용된 전문에 대각사선을 그은 것과 사릉격문(斜稜格文)의 두 가지 기하문 (幾何文)은 중국 난징(南京)에서 발견된 육조시대(六朝時代) 남조(南朝)의 전 문양과 동일하며, 공주에서 출토된 전 중에 측면에 ‘梁良口爲師矣(양량구위사의)’라는 문자가 오목새김되어 있는 예와 아울러 중국 남조, 특히 양(梁)나라와 문화적인 연관이 깊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전의 사용 범위는 넓어지고 형태와 문양, 제작수법에서 눈부신 발전을 보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8엽보상화문을 주문양으로 한 방형전이다. 신라시대에도 불교상을 조각한 전이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경주 사천왕사지에서는 벽을 장식하던 사천왕상전이 출토되어 크기, 각선의 예리함, 도상(圖像)의 특이함, 녹유(綠釉) 시유 등 7세기 후반의 신라 공예기술을 과시하고 있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는 전탑이 상당수 건립되었는데 그 중에는 문양전을 사용한 예가 있다. 고려시대에도 전은 여전히 사용되었으나 신라시대의 다양한 형태와 화려한 문양 등에 비하면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초기에는 신라의 형식을 따른 보상화 또는 연화가 장식된 방형전 또는 녹유전이 간혹 발견되나 초기가 지나면서 대부분 벽전이고, 문양은 신라의 문양이 선적(線的)이어서 화사한 느낌을 주는 데 반하여 고려의 문양은 면을 넓게 살려서 조형감각에 차이가 있다. 때로는 문양의 배경에 횡선 또는 물결무늬를 촘촘히 쳐서 번잡스러운 느낌이 난다. 고려시대에도 신라의 풍을 따라 문양전으로 축조한 탑이 1기가 남아 있는데, 경기도 여주 신륵사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이 그것이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는 동안 원형과 많이 달라졌지만, 반원연주문(半圓聯珠文) 안에 당초문을 장식한 문양이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의 전은 빈약한 듯하면서도 특수한 것이 있다.
2639 명문평기와편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지붕재(지붕재) 암키와(암키와)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0013 / 000
상세설명 [정의]
가옥의 지붕을 덮는 옥개용(屋蓋用)의 건축부재를 말한다.
[발달과정/역사]
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모골(模骨) 및 와범(瓦範) 등의 제작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서 제작한다. 한국에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한국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조적에 맞게 구조가 변형되어, 이른바 한국적인 양식으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3세기말 이후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 건물자리에서 비로소 와당이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는 각 국의 특징이 있는 와당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궐 및 사찰의 건축 조영을 담당하는 관서(官暑)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나라에서 쓰는 기와만을 전담하는 와박사(瓦博士)의 직제(職制)가 있었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었다. 신라에는 특별히 와당만을 제조하는 와기전(瓦器典)이란 마을이 있었으며,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기와 지붕은 기본적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그리고 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은 먼저 수키와(圓瓦, 夫瓦)와 암키와(平瓦, 女瓦)로 이어 덮게 되는데, 대부분의 수키와와 암키와는 원통형의 목제 모골의 외측에 마포나 무명 등의 포목을 감고 양질의 진흙을 다진 점토판(粘土板)을 씌워 고판(叩板)으로 두들겨 얼마 동안의 건조기간을 거친 다음에 와도(瓦刀)로 2분하거나 3분 또는 4분하여 제작한다. 형태에 따라 기와의 끝에 언강이라고 부르는 낮은 단(段)이 있어서 미구를 내밀고 있는 유단식(有段式)과 , 언강과 미구가 없는 토시형의 무단식(無段式)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대부분 그 표면에 선(線)·승석(繩蓆)·격자(格字)·화엽(花葉) 등의 고판무늬가 장식되고 있다. 이 기와는 ○妙○銘의 명문기와로 명문을 중심으로 미로형의 태선과 집선문의 세선이 있다. 배면에는 포흔이 흐리게 보인다. 굵은 석영이 다량 혼입되었으며 회색의 경질기와이다.
2638 암막새편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지붕재(지붕재) 암막새(암막새)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0012 / 000
상세설명 [정의]
가옥의 지붕을 덮는 옥개용(屋蓋用)의 건축부재를 말한다.
[발달과정/역사]
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모골(模骨) 및 와범(瓦範) 등의 제작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서 제작한다. 한국에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한국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조적에 맞게 구조가 변형되어, 이른바 한국적인 양식으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3세기말 이후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 건물자리에서 비로소 와당이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는 각 국의 특징이 있는 와당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궐 및 사찰의 건축 조영을 담당하는 관서(官暑)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나라에서 쓰는 기와만을 전담하는 와박사(瓦博士)의 직제(職制)가 있었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었다. 신라에는 특별히 와당만을 제조하는 와기전(瓦器典)이란 마을이 있었으며,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기와 지붕은 기본적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그리고 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암막새는 암키와로 형성된 기왓골의 끝에 막새부(드림새)를 접합시킨 기와를 말한다. 삼국통일 이후 유행하였으며, 수막새와 마찬가지고 그 시대적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당초문(唐草文)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보상화문(寶相華文)을 비롯한 각종 동식물문양이 새겨져 있다. 문양은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당초문 등의 덩굴문양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 기와는 회백색의 연질로 대부분 결실되어 문양의 형태를 알 수 없으나 운문(雲紋)으로 보여진다. 빗질한 흔적이 보이며 굵은 석영이 혼입되었으며 태토는 정선되었다.
2637 명문평기와편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지붕재(지붕재) 암키와(암키와)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0011 / 000
상세설명 [정의]
가옥의 지붕을 덮는 옥개용(屋蓋用)의 건축부재를 말한다.
[발달과정/역사]
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모골(模骨) 및 와범(瓦範) 등의 제작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서 제작한다. 한국에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한국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조적에 맞게 구조가 변형되어, 이른바 한국적인 양식으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3세기말 이후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 건물자리에서 비로소 와당이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는 각 국의 특징이 있는 와당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궐 및 사찰의 건축 조영을 담당하는 관서(官暑)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나라에서 쓰는 기와만을 전담하는 와박사(瓦博士)의 직제(職制)가 있었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었다. 신라에는 특별히 와당만을 제조하는 와기전(瓦器典)이란 마을이 있었으며,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기와 지붕은 기본적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그리고 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은 먼저 수키와(圓瓦, 夫瓦)와 암키와(平瓦, 女瓦)로 이어 덮게 되는데, 대부분의 수키와와 암키와는 원통형의 목제 모골의 외측에 마포나 무명 등의 포목을 감고 양질의 진흙을 다진 점토판(粘土板)을 씌워 고판(叩板)으로 두들겨 얼마 동안의 건조기간을 거친 다음에 와도(瓦刀)로 2분하거나 3분 또는 4분하여 제작한다. 형태에 따라 기와의 끝에 언강이라고 부르는 낮은 단(段)이 있어서 미구를 내밀고 있는 유단식(有段式)과 , 언강과 미구가 없는 토시형의 무단식(無段式)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대부분 그 표면에 선(線)·승석(繩蓆)·격자(格字)·화엽(花葉) 등의 고판무늬가 장식되고 있다. 이 기와는 ○妙○銘의 평기와편으로 명문을 중심으로 세선의 집선문과 격자문이 시문되어 있다. 배면에는 포흔이 흐리게 보이며 회청색의 경질기와이다.
2636 백자대접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대접(대접)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0010 / 000
상세설명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과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했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15세기경부터는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7세기경부터 주류를 이룬다. 그 외에 청자와 마찬가지로 상감백자, 철화백자 등의 종류가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백자는 청자보다 더 순수한(철분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은) 태토인 백토(高嶺土)를 이용하여 형태를 만들고 철분이 거의 포함되지 않은 무색투명의 장석질 유약을 입혀 1300℃ 이상의 고온에서 환원번조의 방식으로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냐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백자대접은 색조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있는 회백색의 유조로 물레질한 흔적이 보인다. 굽 접지면 안쪽에 굵은 규석이 혼입되어 있으며 내, 외측면에 이물질이 다량 부착되어 있다. 내저면에는 모래받침의 흔적이 약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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