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어느 한 직책에 합당한 인물을 천거할 때 사용하는 문서로 서두에 망(望) 혹은 천망(薦望)을 기입하였다. 망첩 또는 망단자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한 직책에 3사람을 후보자로 열거하는 3망이 원칙이었으나,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이 망기(望記)는 임자년(壬子年) 10월(月) 전사시(奠祀詩) 헌관(獻官) 및 제집사(諸執事) 분방기(分榜記)이다.
2154
시(詩)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문화예술(文化藝術) 문헌(文獻) 문학(文學) 시(詩)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유물번호
000234 / 000
상세설명
[정의]
외형률(外形律)을 가진 운문인 노래.
[내용]
시가는 문학의 여러 부류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양식이다. 그러므로 시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시가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한 질문과 해명은 옛날부터 많은 사람에 의하여 여러 가지로 정의되어 왔고 또한 그것은 앞으로도 무한히 거듭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가의 정의란 사람에 따라, 그리고 시대와 환경에 따라 각기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명은 이와 같이 무한으로 존재한다. 무한히 많은 해명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시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만인이 수긍하고 만족할 만한 대답은 없다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환경, 그리고 관점에 따른 상위점을 넘어서 주목할 만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란 언어예술이라는 정의다. 시는 전통적으로 과학이나 실용적인 지식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예술에 속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형식으로서 한국시가는 원시종합예술(ballade dance)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시가는 독립된 양식으로서가 아니라 음악·무용과 함께 미분화 상태로 있었다. 시가·음악·무용의 삼위일체, 그러한 미분화상태가 시가의 당초성이자 원천이다. 그리하여 원시종합예술은 분화, 발전하여 몸짓은 무용과 연극으로, 소리는 음악으로, 말은 시로 나타났다. 시가의 경우 처음에는 구비문학의 단계를 거치다가 문자 발생 이후에 기록문학으로 정착하였다고 보아진다. 한국시가의 첫출발 또한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서력기원 전후로 소급된다. 자료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진수(陳壽)의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보이는 원시종합예술체인 원시가무(原始歌舞)의 자취와 현존하는 호남지방의 〈강강술래〉나 영남지방의 〈쾌지나 칭칭 나네〉와 같이 고대의 집단예술을 방불하게 하는 민속가무 등을 통하여 그 편린을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이때의 예술활동은 주로 집단이 모여 음주가무하는 것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농경생활 및 제의와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독창적인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거기에 따른 예술활동을 하였다는 사실이 당시 사람들의 예술관을 집약적으로 암시한다. 따라서 시가 또한 제천의식(祭天儀式)이라는 원시종합예술로서의 음악과 놀이와 더불어 그 속에 융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가란 바로 노래요, 놀이요, 또한 제의와 더불어 있다. 결국 한국시가의 첫출발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술을 마시고 노래와 춤을 추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문헌에 기록되어 그 온전한 모습이 남아 있는 삼국시대 초기 또는 그 이전의 시가로는 단 세 편이 있을 뿐이다. 흔히 '고대가요' 또는 '상대가요'라고 하는 〈구지가(龜旨歌)〉·〈황조가(黃鳥歌)〉·〈공후인(謙隸引)〉과 같은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그나마도 원래 가사는 망실되고 한역시(漢譯詩)가 전해올 뿐이다. 이 시는 내물왕릉(奈勿王陵) 초대침랑(初代寢郞) 김필대(金必大)가 해임(解任) 후 귀가(歸嫁)할 때 지어 준 송별시(送別詩)이다.
2153
송담서원추록(松潭書院追錄)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사회제도(社會制度) 문서(文書) 관문서(官文書)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유물번호
000233 / 000
상세설명
[정의]
한문문체의 하나로 사실을 그대로 적는 글을 말한다.
[내용]
사물을 객관적인 관찰과 동시에 기록하여 영구히 잊지 않고 기념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을 두는 글이다. 옛사람이 기(記)라고 이름을 한 문장은 너무나 광범하여 일체의 기사문(記事文)과 기물문(記物文)을 포괄하고 있다. 현존하는 기의 문장을 분석하면 인물을 적기도 하고 사건이나 물품, 또는 산수풍경을 적기도 하였다. 그래서 기는 대각명승기(臺閣名勝記)·산수유기(山水遊記)·서화잡물기(書怜雜物記)·인사잡기(人事雜記) 등으로 구분한다. 대각명승기는 옛사람이 누각이나 정자를 신축 또는 개축하거나 명승고적을 관람할 때를 기념하여 쓰는 것이다. 돌에 새기기도 하고 현판으로 만들어 걸기도 한다. 중국 북송시대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 왕우칭(王禹祖)의 〈황강죽루기(黃岡竹樓記)〉, 구양수(歐陽脩)의 〈취옹정기(醉翁亭記)〉, 소식(蘇軾)의 〈희우정기(喜雨亭記)〉 등이 명작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의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 이제현(李齊賢)의 〈운금루기(雲錦樓記)〉, 조선 말기에 김택영(金澤榮)의 〈남폭정기(攬瀑亭記)〉 등이 대표적이다. 산수유기는 앞의 대각명승기와 비슷하지만 꼭 같지는 않다. 대각명승기의 경우는 작자가 그 장면을 보지 않고 자료를 얻어 쓰는 수도 있지만, 산수유기는 작자가 직접 그 장면을 보고 기록한다는 차이가 있다. 당나라 유종원(柳宗元)의 〈영주팔기(永州八記)〉, 조선 후기 박지원(朴趾源)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등이 명작이다. 서화잡물기는 서화(書怜)·기물(器物)·물품 등만을 적은 것이다. 서(序)로 명명한 것도 있다.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여지도서(旣枝圖序)〉, 한유(韓愈)의 〈화기(怜記)〉, 고려시대 임춘(林椿)의 〈화안기(怜雁記)〉, 조선시대 박지원(朴趾源)의 〈표구기(豹汨記)〉 등이 명문이다. 인사잡기는 기인(記人)·기사(記事)를 중심으로 쓴 것이다. 박지원의 〈이존당기(以存堂記)〉, 이건창(李建昌)의 〈수당기(修堂記)〉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지(志)'는 이름을 기라고 하지 않았지만 기인(記人)의 내용을 한 경우가 있다. 명나라 귀유광(歸有光)의 〈항척헌지(項脊軒志)〉와 조선 중기 이식(李植)의 〈택풍당지(澤風堂志)〉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명목은 다르지만 목적은 하나이고 체제 또한 동일하다. 기의 명칭은 ≪주례 周禮≫의 〈고공기(考工記)〉와 ≪예기(禮記)≫의 〈학기(學記)〉·〈악기(樂記)〉·〈방기(坊記)〉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예기≫의 기는 대체로 논체(論體)이고 기체(記體)가 아니다. ≪주례≫의 〈고공기〉가 전적인 사실(寫實)의 필체이므로 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단편의 기체로는 미비한 점이 적지 않다. 양웅(揚雄)의 기에 이르러 기체가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에 기문체가 유행되지 않아서 ≪문선(文選)≫에 기의 문체가 등재되지 않았고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도 다루지 않았다. 기는 당대(唐代) 이후에 와서야 한유의 〈화기〉, 유종원의 영주팔기 등의 출현으로 완성을 보게 되었다. 송대(宋代) 구양수·소식 등에 이르러 기를 서사체가 아닌 논설체로 썼다. 당시대의 진사도(陳師道)는 "한퇴지는 기를 기사체로 썼는데 지금은 기를 의론체로 쓴다."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그런제도 후대는 개선
2152
청구서(請求書)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사회제도(社會制度) 문서(文書) 사문서(私文書)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유물번호
000232 / 000
상세설명
[내용]
상대편에게 일정한 행위를 요구하는 문서로 이 청구서는 삼척군(三陟郡) 북삼면(北三面) 추암리(楸巖里)에 소재하는 불하(拂下) 토지(土地)에 대한 소유권 이전을 청구한 문서이다.
2151
묘갈명(墓碣銘)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사회제도(社會制度) 문서(文書) 사문서(私文書)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유물번호
000231 / 000
상세설명
[정의]
무덤 앞에 세우는, 머리 부분이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
[내용]
묘갈은 형태가 둥글고 묘주의 품계가 5품 이하이며 그 체제가 질실한 것이다. '묘갈'과 '묘비(墓碑)'는 본래 묘소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 본래는 구분되었으나 후대에 와서 서로 통용되었다. ≪후한서(後漢書)≫ 주 (注)에 "네모진 것이 비, 둥근 것이 갈이다." 하였고, 진역증(陳繹曾)은 "비의 체재는 웅혼전아(雄渾典雅:기운차고 원숙하며 고상함.)하고, 갈의 체재는 질실전아(質實典雅:소박하고 고상함.)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대(唐代)에 와서는 관직이 4품 이상은 귀부이수(龜趺賂首 : 거북모양을 새긴 비석의 받침돌과 용모양을 새긴 비석의 머릿돌)인 비를 세울 수 있고, 5품 이하는 방부원수(方趺圓首)인 갈을 세우도록 규제하였다. 그런데 후대에는 비와 갈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문헌상의 최초의 갈은 진(晉)나라 때 반니(潘尼)의 반황문갈(潘黃門碣)이다. 그러나 그 뒤에 갈이라 이름을 붙인 비석은 많지 않다. 간혹 있다 하여도 높다랗게 크게 세워 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갈'의 서법은 갈명(碣銘)·갈(碣)·갈명병서(碣銘幷序) 등으로 제목이 각기 다르게 호칭되지만 결과는 '비'와 같다. 그래서 명(銘)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갈'이라고 하고서 명을 붙이기도 하고, '갈명'이라 하고도 명을 붙이지 않기도 하여 엄격한 전칙이 없다. 묘갈의 특징은 엄정한 시비 선악을 판단하여 결정하는 포폄의식(褒貶意識)에 의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은이의 방명(芳名 : 이름, 좋은 평판)을 후세에 유전시키려는 것이 사명이므로, 긍정적인 측면에서만 기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객관적 시각에서 한 개인의 진실된 삶의 모습을 제시하려는 사가의 열전(列傳)과는 다르게, 나쁜 것은 빼고 좋은 점만을 기록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용면에서 재료적 가치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묘갈은 서사(敍事)를 위주로 하는 정체(正體)와 의론(議論)을 위주로 하는 변체(變體)가 있다. 혹은 선계(先系)를 먼저 서술하고 다음에 공덕과 손록(孫錄:후손들의 계보를 기록함.)을 기술하는 경우가 있고, 혹은 공덕부터 먼저 표양하고 선계와 손록을 적는 경우가 있다. 명(銘)은 운문(韻文)으로 사언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나 오언·칠언 장단구(長短句)로 된 것도 적지 않다. 우리 나라의 갈은 고려시대 최충(崔沖)의 〈홍경사갈(弘慶寺碣)〉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묘갈을 찾아볼 수 없고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움트기 시작하다가 중엽 이후에 성행하게 된다. 특히 송시열(宋時烈)이 많은 작품을 남겨서 후대 금석가(金石家)의 표본이 되었다. 이 묘갈은 통훈대부중추원의관(通訓大夫中樞院議官) 농은부군(聾隱府君)의 묘갈명(墓碣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