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전면(前面) 상반부를 상하로 열고 닫는 문판(門板:잦혀 열게 된 문짝의 널)을 가진 장방형의 단층의류궤(單層衣類櫃).
[개설]
나무로 짜서 물건을 넣어두는 장방형의 커다란 그릇으로 궤(櫃)의 일종이다. 궤의 원류는 버들고리와 관계가 있으며, 반닫이는 궤의 윗널이나 앞널의 절반쯤을 문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열리게 한 데서 생긴 호칭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표준치수 높이 60∼100cm, 앞면 너비 65∼90cm, 옆면 너비 30∼45cm. 지방에 따라 의류뿐만 아니라 귀중한 두루마리문서·서책·유기류(鍮器類)·제기류(祭器類) 등의 기물을 보관, 저장하는 가구로서도 사용하였다. 서민층에서는 반닫이 위에 이불을 얹거나 기타 가정용구를 올려놓고 실내에서 다목적으로 쓰는 집기였다. 반닫이 역시 소반과 같이 지방에 따라 특색이 있는데, 그 기본형태는 변함없으나 장식과 쓰인 재료가 특이하다. 강화반닫이는 반닫이 중 가장 상품으로 손꼽으며 그 섬세하고 치밀한 세공이 놀라워 조선조 궁궐용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금구장식으로는 무쇠와 놋쇠가 주재(主材)이며, 약과형의 긴 경첩 속에 亞자·卍자를 투각한 것이 많고 감잡이(합쳐 못을 박은 쇠) 장식도 화려하다. 흔히 중앙에는 호리병형의 경첩이 한 개 있으며, 문판 중심에 걸리는 직선형 뻗침대가 있다. 문판을 열면 내부상단에 세 개의 서랍이 있고 느티나무나 소나무가 주재로 되어 있다. 경상도반닫이는 경상남도 지방의 제작으로, 그 중 밀양반닫이가 유명하다. 크기가 대체로 작으며 장식이 많지 않고 나뭇결의 무늬를 살린 소박한 느낌을 준다. 박천(博川)반닫이는 평안도지방산으로 형이 크고 장식금구를 많이 쓰고 바탕목재는 결이 없는 피나무를 흔히 썼다. 장식문양으로 붕어·남대문 등이 눈에 띄며, 조선조 전기에는 무쇠판에 구멍을 뚫어 장식한 것이 있는데, 이를 '쑹소이반닫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후기에 이르면서 놋쇠장식의 약과형 긴 경첩이 7, 8개 나란히 붙어 육중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제주반닫이는 너비에 비하여 높이가 높으며, 세 개의 큰 불로초 장경첩이 두꺼운 무쇠판으로 장식되어 있다. 양 옆널에는 무쇠 달형 들쇠가 하나씩 있고 전면에 국화형 감잡이와 능형(菱形) 광두정못이 3면 모서리를 장식한 것이 많으며 재료는 느티나무가 많이 보인다. 대체로 반닫이의 구조는 두꺼운 통판의 천판과 측널을 잇고 있으며 천판과 뒷널, 천판과 옆널의 짜임은 맞짜임형식이고, 옆널과 앞널, 옆널과 뒷널의 짜임새는 사개물림(네 갈래로 오려내고 맞추는 기법)의 우리 나라 특유의 결구법을 쓰고 있다. 이 반닫이는 상단 중앙부에 초형(草形)앞바탕을 중심으로 양쪽에 박쥐형들쇠(擧金)가 장식되었다. 상단의 문짝과 하단의 궤짝을 연결하는 장석은 호리병형(葫盧甁形)경첩 5개가 붙었는데 모두 희(囍)자를 음각하였다. 상단에 화형(花形)귀장식과 둥근형(圓形)광두정을 부착하였고, 하단에 화형(花形)귀장식과 제비추리형감잡이 달과두정을 붙였다. 하단에 물고기모양(魚形)장식판을 중심으로 양쪽에 꽃모양(花形)장식판이 부착되어 있다.
1609
쇠스랑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산업/생업(産業/生業) 농업(農業) 파종경작(播種耕作) 쇠스랑(쇠스랑)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4637 / 000
상세설명
[정의]
땅을 파헤쳐 고르거나 두엄·풀무덤 등을 쳐내는 데 쓰는 농기구.
[명칭]
명칭은 지역에 따라 '소시랑(인천광역시 덕적도, 전라남도 보성·영광, 전라북도 일대)·소스랑(경상남도 영산)·쇠시랑(전라북도, 경상남도, 강원도 강릉)·소스랭이(평안남도)·쇠서랑' 등으로도 불린다. ≪농사직설≫에는 '철치파(鐵齒擺 : 鄕名 手愁音)'로 표기되어 있고 하위지(河緯地)의 유서(遺書)에는 '소시랑(小時郎)'으로, ≪고사신서(攷事新書)≫ 농포문(農圃門)에는 '소시랑(小屎郎)', ≪해동농서≫에는 '철탑(鐵塔)'으로 올라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모양은 갈퀴모양으로 서너개의 발이 달리고 기역자로 구부러진 한쪽 끝에 나무자루를 박았다. 근래에는 서양의 포크처럼 발과 몸이 곧게 펴진 것을 쓰기도 하는데 이를 '호꾸'라 부른다. 한편, 강원도와 같이 나무가 흔한 곳에서는 가지가 두세 갈래로 벌어진 자연생의 물푸레나무를 이용하여 만들기도 한다. 수렁이 져서 소가 들어서기 어려운 논에서는 이것으로 파서 엎고, 덩어리진 흙을 깬다. 또, 밭의 흙을 파서 고르기도 하고 씨를 뿌린 뒤에 이것으로 흙을 덮기도 하며 두엄을 쳐내는 데에도 쓴다. 소가 갈고 남은 구석진 땅의 흙도 이것으로 다루며 밭에서는 등 부분으로 흙덩이를 부순다. 쇠스랑으로는 남자 한 사람이 하루에 1,000여평의 밭을 고를 수 있다. 발이 두개인 것은 무게가 1.3㎏, 세개 짜리는 1.7㎏쯤 된다. 근래에는 쇠스랑의 목 부분을 한번 더 구부려 힘을 더 잘 받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생산된다. 농가에서는 이것을 밤에 방문 밖에 놓아, 도둑을 잡기도 하였다. 달아나던 도둑이 쇠스랑 발을 밟으면, 자루가 벌떡 일어서서 이마에 큰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다.
1608
쇠스랑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산업/생업(産業/生業) 농업(農業) 파종경작(播種耕作) 쇠스랑(쇠스랑)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4636 / 000
상세설명
[정의]
땅을 파헤쳐 고르거나 두엄·풀무덤 등을 쳐내는 데 쓰는 농기구.
[명칭]
명칭은 지역에 따라 '소시랑(인천광역시 덕적도, 전라남도 보성·영광, 전라북도 일대)·소스랑(경상남도 영산)·쇠시랑(전라북도, 경상남도, 강원도 강릉)·소스랭이(평안남도)·쇠서랑' 등으로도 불린다. ≪농사직설≫에는 '철치파(鐵齒擺 : 鄕名 手愁音)'로 표기되어 있고 하위지(河緯地)의 유서(遺書)에는 '소시랑(小時郎)'으로, ≪고사신서(攷事新書)≫ 농포문(農圃門)에는 '소시랑(小屎郎)', ≪해동농서≫에는 '철탑(鐵塔)'으로 올라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모양은 갈퀴모양으로 서너개의 발이 달리고 기역자로 구부러진 한쪽 끝에 나무자루를 박았다. 근래에는 서양의 포크처럼 발과 몸이 곧게 펴진 것을 쓰기도 하는데 이를 '호꾸'라 부른다. 한편, 강원도와 같이 나무가 흔한 곳에서는 가지가 두세 갈래로 벌어진 자연생의 물푸레나무를 이용하여 만들기도 한다. 수렁이 져서 소가 들어서기 어려운 논에서는 이것으로 파서 엎고, 덩어리진 흙을 깬다. 또, 밭의 흙을 파서 고르기도 하고 씨를 뿌린 뒤에 이것으로 흙을 덮기도 하며 두엄을 쳐내는 데에도 쓴다. 소가 갈고 남은 구석진 땅의 흙도 이것으로 다루며 밭에서는 등 부분으로 흙덩이를 부순다. 쇠스랑으로는 남자 한 사람이 하루에 1,000여평의 밭을 고를 수 있다. 발이 두개인 것은 무게가 1.3㎏, 세개 짜리는 1.7㎏쯤 된다. 근래에는 쇠스랑의 목 부분을 한번 더 구부려 힘을 더 잘 받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생산된다. 농가에서는 이것을 밤에 방문 밖에 놓아, 도둑을 잡기도 하였다. 달아나던 도둑이 쇠스랑 발을 밟으면, 자루가 벌떡 일어서서 이마에 큰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다.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핬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15세기경부터는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7세기경부터 주류를 이룬다. 그 외에 청자와 마찬가지로 상감백자, 철화백자 등의 종류가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백자는 청자보다 더 순수한(철분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은) 태토인 백토(高嶺土)를 이용하여 형태를 만들고 철분이 거의 포함되지 않은 무색투명의 장석질 유약을 입혀 1300℃ 이상의 고온에서 환원번조의 방식으로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백자제기는 제사에 쓰이는 그릇으로 제사에 쓰이는 그릇은 일상 생활에 사용되는 그릇과는 달리 만들어져 있다. 편을 담은 편틀은 네모로 크게 만들어져 쓰지 않을 때는 여러 개를 포개어 간수할 수있다. 그리고 접시류는 둥근 모양에 밑으로 높은 받침이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제기에는 목기(木器)가 많고 유기나 사기도 있으며, 크고 눞은 제상과 함께 별도로 보관했다가 제사 때에만 사용하게 되어 있다.구연(口緣)은 외반되었고, 깊이가 비교적 깊고, 내저(內底)가 둥근 곡면을 이루는 동체(胴體)를 지녔다. 접시를 받치는 굽다리는 원통형(圓筒形)으로, 바닥으로 내려 갈수록 나팔 형태로 벌어졌다. 유색은 담청을 머금은 백자유(白磁釉)가 시유되었으나, 빙렬(氷裂)이 있고, 빙렬(氷裂) 틈으로 갈색 때가 끼어 들어가 있다. 굽다리 바닥에 모래를 받치고 번조하였다. 내저면(內底面)에 모래 부스러기가 묻어있다.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핬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15세기경부터는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7세기경부터 주류를 이룬다. 그 외에 청자와 마찬가지로 상감백자, 철화백자 등의 종류가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백자는 청자보다 더 순수한(철분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은) 태토인 백토(高嶺土)를 이용하여 형태를 만들고 철분이 거의 포함되지 않은 무색투명의 장석질 유약을 입혀 1300℃ 이상의 고온에서 환원번조의 방식으로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백자제기는 제사에 쓰이는 그릇으로 제사에 쓰이는 그릇은 일상 생활에 사용되는 그릇과는 달리 만들어져 있다. 편을 담은 편틀은 네모로 크게 만들어져 쓰지 않을 때는 여러 개를 포개어 간수할 수있다. 그리고 접시류는 둥근 모양에 밑으로 높은 받침이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제기에는 목기(木器)가 많고 유기나 사기도 있으며, 크고 눞은 제상과 함께 별도로 보관했다가 제사 때에만 사용하게 되어 있다.낮은 동체(胴體)에 연결된 구연(口緣)은 둥글게 곧장 마감된 상태이고, 곡면을 이루는 내저(內底)에는 모래 부스러기가 묻어있다. 굽다리는 원통형(圓筒形)으로, 아래로 갈수록 벌어진 상태이다. 회청색을 띠는 백자유(白磁釉)가 시유되었으나, 시유 상태가 고르지 못하다. 굽다리 바닥에 모래를 받치고 번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