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핬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15세기경부터는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7세기경부터 주류를 이룬다. 그 외에 청자와 마찬가지로 상감백자, 철화백자 등의 종류가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백자는 청자보다 더 순수한(철분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은) 태토인 백토(高嶺土)를 이용하여 형태를 만들고 철분이 거의 포함되지 않은 무색투명의 장석질 유약을 입혀 1300℃ 이상의 고온에서 환원번조의 방식으로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백자소접은 구연(口緣)은 외반되었고, 외측면선(外側面線)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 저부(底部)에서 각을 이루며 좁아들어 굽에 이른다. 내외면(內外面) 모두 무문(無文)으로, 물레 성형 흔적이 남아있다. 담청을 머금은 백자유(白磁釉)가 시유되었으나, 시유 상태가 고르지 못하고, 빙렬(氷裂)이 나있다. 굽은 다리굽이며, 굽다리 바닥에 모래를 받치고 번조하였다.
1509
백자이수혼지석(白磁李守渾誌石)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의례생활(儀禮生活) 상장(喪葬) 묘지(墓誌)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기타(其他)
유물번호
004397 / 000
상세설명
[정의]
피장자의 성명, 직함, 가족세계, 생시행적 등을 써서 무덤 가운데에 남기는 기록물이다.
[발달과정/역사]
무덤방(墓室)에 직접 묵서(墨書) 혹은 주서(朱書)하거나 무덤방 벽면에 새기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돌 위에 새기는 것이나 틀을 이용하여 벽돌, 혹은 주철을 소재로 작성된 것에서 청자나 백자에 쓰여진 것으로 남겨진 것 등이 시대와 피장자의 신분, 장법 등에 따라서 다양하다. 원래 묘지는 중국에서 동한(東漢) 시기에 기원하여 위진시대 이후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풍습이 한국에도 유입된 것이라 하겠다. 河南省 洛陽에서 출토된 한(漢) 연평원년(延平元年:A.D. 106) 고무중(賈武仲)의 처 마강(馬姜)의 묘지는 기재 내용이 묘지에 가까운 것이긴 하지만 완성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 그런데 江蘇省 丕縣에서 발견된 무우(繆宇)의 묘에는 뒷방(後室) 입구 상단에 피장자의 성명, 사망, 장례일자, 관직, 송사(頌辭) 등의 내용이 새겨 있다. 한국에서 묘지라 하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묘에서 주로 보이는 명문이 새겨진 방형의 소석판(小石版)이나 도판(陶版) 등의 형태를 일컫는다. 하지만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묘지라고 하면 무덤의 벽면에 쓰여지거나 새겨진 명문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에는 무덤방 벽면에 묵서로 묘지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현재 3기의 고분이 그러한데 모두루총(牟頭婁塚), 동수묘(冬壽墓)로 알려진 안악(安岳) 3호분, 그리고 덕흥리(德興里) 고분이 그것이다. 협의의 개념에서 소판의 형식을 빌린 묘지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백제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나온 것이다. 벽돌무덤인 무녕왕릉의 널방(玄室) 입구에서 왼쪽에는 왕비의 지석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왕의 것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는 양나라 때 오수전이 한 꾸러미 놓여 있었다. 사실 무녕왕릉의 묘지석은 묘지라고 부르기보다는 중국의 장례 풍속을 따라 지신으로부터 땅을 사들인다는 뜻으로 만든 매지권(買地權)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한국에서 묘지가 흔하게 발견되기는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고려시대에는 오석(烏石), 혹은 점판암계의 장방형 석판을 물갈이해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조선시대가 되면 오석이나 점판암과 함께 자기로 된 도판이 많이 쓰이게 되었다. 특히 흰색의 방탕에 청색으로 글씨를 쓴 청화백자계의 묘지가 많이 쓰였다. 고려시대의 묘지가 중국 묘지의 체제를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면, 조선시대의 묘지는 재료, 형태, 내용 등에서 고려시대의 것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소판형(小板形)의 기본 틀에서 벗어난 조선시대의 묘지는 묘비모양, 단지모양, 원통형, 표주형(標柱形) 등 다양하다. 또한 장례의식 중 묘지를 안치하는 광정에서 다양한 면모가 엿보이기 때문에 묘지의 작성과 그것의 매납은 단순히 피장자의 이름이나 약력을 알린다는 것 이상의 관념이 있는 듯하다. 이 백자지석은 2편의 직사각편형 백자(白磁) 지석(誌石)이다. 외곽으로 사각형 선을, 그 안에는 가로세로 구획을 가늘게 지어서 1칸에 1자씩 음각(陰刻)했다. 2편 뒷면에는 “第二”처럼 편수만 표기하였다.
[정의]
피장자의 성명, 직함, 가족세계, 생시행적 등을 써서 무덤 가운데에 남기는 기록물이다.
[발달과정/역사]
무덤방(墓室)에 직접 묵서(墨書) 혹은 주서(朱書)하거나 무덤방 벽면에 새기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돌 위에 새기는 것이나 틀을 이용하여 벽돌, 혹은 주철을 소재로 작성된 것에서 청자나 백자에 쓰여진 것으로 남겨진 것 등이 시대와 피장자의 신분, 장법 등에 따라서 다양하다. 원래 묘지는 중국에서 동한(東漢) 시기에 기원하여 위진시대 이후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풍습이 한국에도 유입된 것이라 하겠다. 河南省 洛陽에서 출토된 한(漢) 연평원년(延平元年:A.D. 106) 고무중(賈武仲)의 처 마강(馬姜)의 묘지는 기재 내용이 묘지에 가까운 것이긴 하지만 완성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 그런데 江蘇省 丕縣에서 발견된 무우(繆宇)의 묘에는 뒷방(後室) 입구 상단에 피장자의 성명, 사망, 장례일자, 관직, 송사(頌辭) 등의 내용이 새겨 있다. 한국에서 묘지라 하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묘에서 주로 보이는 명문이 새겨진 방형의 소석판(小石版)이나 도판(陶版) 등의 형태를 일컫는다. 하지만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묘지라고 하면 무덤의 벽면에 쓰여지거나 새겨진 명문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에는 무덤방 벽면에 묵서로 묘지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현재 3기의 고분이 그러한데 모두루총(牟頭婁塚), 동수묘(冬壽墓)로 알려진 안악(安岳) 3호분, 그리고 덕흥리(德興里) 고분이 그것이다. 협의의 개념에서 소판의 형식을 빌린 묘지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백제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나온 것이다. 벽돌무덤인 무녕왕릉의 널방(玄室) 입구에서 왼쪽에는 왕비의 지석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왕의 것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는 양나라 때 오수전이 한 꾸러미 놓여 있었다. 사실 무녕왕릉의 묘지석은 묘지라고 부르기보다는 중국의 장례 풍속을 따라 지신으로부터 땅을 사들인다는 뜻으로 만든 매지권(買地權)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한국에서 묘지가 흔하게 발견되기는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고려시대에는 오석(烏石), 혹은 점판암계의 장방형 석판을 물갈이해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조선시대가 되면 오석이나 점판암과 함께 자기로 된 도판이 많이 쓰이게 되었다. 특히 흰색의 방탕에 청색으로 글씨를 쓴 청화백자계의 묘지가 많이 쓰였다. 고려시대의 묘지가 중국 묘지의 체제를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면, 조선시대의 묘지는 재료, 형태, 내용 등에서 고려시대의 것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소판형(小板形)의 기본 틀에서 벗어난 조선시대의 묘지는 묘비모양, 단지모양, 원통형, 표주형(標柱形) 등 다양하다. 또한 장례의식 중 묘지를 안치하는 광정에서 다양한 면모가 엿보이기 때문에 묘지의 작성과 그것의 매납은 단순히 피장자의 이름이나 약력을 알린다는 것 이상의 관념이 있는 듯하다. 이 백자지석은 조선 선조(宣祖) 10년(1577)에 제작된 이수혼(李守渾)의 백자(白磁) 지석(誌石)이다. 평면이 거의 네모꼴(方形)에 가깝고 모서리를 약간 둥글게 처리하였다. 외곽으로 사각형 선을, 그 안에는 가로세로 구획을 가늘게 지어서 1칸에 1자씩 음각(陰刻)했다. 1편 뒷면에는 ‘有明朝鮮國江原道江陵府宣務郞鍾城敎授李公墓誌 第一盖’라는 표제문(表題文)과 편수(片數)를 함께 표기하였다.
第一
①宣務郞鍾城敎授李公墓誌
②公諱
1507
갈모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의(衣) 관모(冠帽) 모(帽) 갈모(葛帽)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4383 / 000
상세설명
[정의]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는 우장(雨裝).
[역사]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조선 초기부터 갓을 쓰기 시작하였고, 선조 때 이제신(李濟臣)이 쓴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禹鯖磨語)≫에는 명종 때를 전후한 입제(笠制)의 설명 중에 우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원래 명칭은 입모(笠帽 : 갓모)이며, 우모(雨帽)라고도 한다.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둥그스름하게 퍼져 있어 펼치면 고깔모양이 되고 접으면 홀쭉해서 쥘부채처럼 된다. 갈모지 또는 환지라는 기름을 먹인 종이에 접는 간살마다 대를 가늘게 잘라서 만든 살을 넣고, 꼭대기에 닭의 볏처럼 생긴 꼭지를 단다. 안쪽 중턱의 양옆에 실끈을 달아서 비가 올 때에는 갓 위에 펼쳐쓴 뒤 이 끈을 턱밑에 매어 고정시킨다.
[정의]
조선시대 성인 남자가 머리에 쓰던 관모(冠帽). 머리를 덮는 부분인 모자(帽子)와 얼굴을 가리는 차양부분인 양태(凉太)로 이루어진다.
[개념]
원래 햇볕이나 비와 바람을 가리기 위한 실용적인 용구로서의 쓰개였으나, 재료·형태·제작법이 다양하게 발전하면서 사회성을 가지는 관모로 되었다. 우리 나라의 갓은 형태상으로 볼 때 모자와 양태의 구별이 어려운 방갓형[方笠型]과 구별이 뚜렷한 패랭이형[平凉子型]의 두 계열이 있다. 방갓형의 갓으로는 삿갓[蘆笠]·방갓[方笠]·전모(氈帽) 등이 있다. 패랭이형으로는 패랭이·초립(草笠)·흑립(黑笠)·전립(戰笠)·주립(朱笠)·백립(白笠) 등이 있다. 넓은 의미의 갓이라고 하면 방갓형과 패랭이형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것을 말하나, 일반적으로는 좁은 의미의 갓, 즉 흑립을 말한다.
[역사]
갓의 역사는 멀리 고대에 소급되며, 그 시초형(始初形)은 경주 금령총(金鈴塚)에서 출토된 입형백화피모(笠形白樺皮帽)와 고구려 고분인 감신총(龕神塚) 벽화에 나오는 모자와 양태의 구별이 뚜렷한 패랭이형의 갓을 쓴 수렵인물에서 볼 수 있다. 문헌상으로는 ≪삼국유사≫에 신라 원성왕이 꿈에 복두(邏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갓은 삼국시대에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관리들의 관모로 제정됨으로써 신분이나 관직을 나타내는 사회적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1357년(공민왕 6)에 문무백관에게 갓을 쓰도록 한 것인데, 이어 1367년 7월에는 아문(衙門)의 정3품 이하 관원들에게 각기 품수에 따라 백옥·청옥·수정 등으로 장식된 흑립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1374년 4월에는 재상(宰相)·중방(重房)·각문(閣門)이 모두 갓을 착용하도록 하였는데, 그때의 갓은 재료나 제작기술상 조선시대의 흑립과는 다르나 형태는 패랭이형일 것이다. 갓은 고려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패랭이·초립의 단계를 거쳐 흑립으로 발전되었다. 태종 때 한때 백관들이 갓을 쓰고 궁궐에 출입한 적이 있었으나, "조로(朝路)에 우설일(雨雪日)이 아닌데도 대소관리(大小官吏)가 착립(着笠)하고 있어 미편(未便)하다."고 하여, 이듬해부터 조정에서는 사모(紗帽)를 쓰게 되고 갓은 편복(便服)에 착용하게 되었다. 다양했던 관모 중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갓은 특히 양반층에서 즐겨 썼다. 1894년 단발령의 시행으로 중절모자가 등장하지만 갓은 계속 착용되었다. 1895년에는 천인층(賤人層)에게도 갓을 쓰도록 허락하고 패랭이 쓰는 것을 금함으로써, 의관제도에 귀천의 차별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화되었다. 조선의 갓 문화는 계속 이어져 민족항일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의관 갖추기를 잃지 않았고, 지금도 두루마기에 갓을 쓴 모습을 볼 수 있다.
[종류]
한자로 '흑립(黑笠)' 또는 '입자(笠子)'로 표기되기도 하는 갓은 성인남자용으로 그 형태는 위보다 아래가 조금 넓은 원통형의 모옥(帽屋), 즉 모자집과 아래가 약간 우긋하게 곡선을 이루고 있는 양태, 즉 차양부분으로 이루어지며, 갓을 머리에 고정시키기 위한 갓끈[笠纓]이 있다. 갓은 싸기(갓싸개)의 종류에 따라 진사립(眞絲笠)·음양사립(陰陽絲笠)·음양립(陰陽笠)·포립 (布笠)·마미립(馬尾笠) 등으로 나뉘고, 신분에 따라 달리 착용되었다. 진사립은 머리카락보다 더 가늘게 다듬은 죽사(竹絲)로 갓모자와 양태를 네겹으로 엮고, 그 위에 중국산 촉사를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