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약을 빻는데 사용하는 절구.
[개념]
원래는 일반 가정에서 절구로 사용되어 깨소금·마늘·생강 등의 조미료를 빻아 쓰는 용기인데, 때로는 가정에서 필요한 구급약을 빻아 쓰기도 하였다.
[역사]
절구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에 자세하지는 않으나, 한대(漢代) 《서청고감(西淸古鑑)》에 한쌍감구(漢雙鑑臼)라 이름 붙여진 절구가 있어 적어도 한대 이전부터 사용·계승되어 왔으리라 짐작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절구는 갈돌의 변형으로 갈돌이나 약연이 곡물 혹은 약의 손실이 많은데 비해서 절구는 손실이 적어 갈돌의 결점을 보완한 기구로 볼 수 있겠다. 이와 같이 절구는 가루를 내는 데는 좋으나 즙을 내기에는 적합치 못한 것이 결점이다. 약절구에는 그 만든 재료에 따라 쇠약절구·나무약절구·놋쇠약절구 등이 있다. 쇠약절구는 밑부분에 나무 받침대를 대어서 흔들리지 않고 안전하게 고정시켰으며, 나무약절구는 용목(느티나무 뿌리 부분)을 잘라 팔각으로 다듬고 가운데를 움푹 파서 절구로 삼고 같은 나무로 공이를 만들어 절구와 공이의 부딪히는 힘을 이용해 가루를 만들어 사용했다. 놋쇠약절구는 손위에 올려 놓고 긴 공이를 이용해서 손과 손의 힘을 조절해 가며 사용한다.
1479
호패(號牌)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사회제도(社會制度) 신표(信標) 호패(號牌)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4127 / 000
상세설명
[정의]
조선시대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발급한 패.
[개념]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으로 호구 파악, 유민 방지, 역(役)의 조달, 신분 질서의 확립, 향촌의 안정 유지 등을 통한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유래]
고려말 1391년(공양왕 3)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계청에 따라 군정(軍丁)에게 이를 패용하게 한데서 시작되었다. 이는 원나라의 제도를 참작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398년(태조 7) 이래 이의 실시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제기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1413년(태종 13) 9월 전인녕부윤(前仁寧府尹) 황사후(黃士厚)의 건의를 받아들여 먼저 호패사목(號牌事目)을 작성하고, 이에 따라 실시하였다. 호패제는 그 뒤 지속적으로 실시되지 못하고 여러 차례 중단되었다. 그 치폐과정(置廢過程)을 보면 1416년 6월 폐지, 1459년(세조 5) 2월 실시, 1469년(성종 즉위년) 12월 폐지, 1610년(광해군 2) 9월 실시, 1612년 7월 폐지, 1626년(인조 4) 1월 실시, 1627년 1월 폐지, 1675년(숙종 1) 11월 실시 등의 변천을 겪으면서 고종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호패제 실시가 때때로 중단되었던 것은 이의 실시에도 불구하고 유망(流亡)이 감소되지 않았고, 양인(良人)들은 호패를 받으면 과중한 각종 국역(國役)을 부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백방으로 호패 받기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세력가에 위탁함으로써 양인수가 오히려 감소되는 현상을 보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위조패(僞造牌)·무패(無牌)·불개패(不改牌)·불각패(不刻牌)·실패(失牌)·환패(換牌) 등 호패법을 위반하는 자에 대한 치죄(治罪)로 형옥(刑獄)이 번거롭고, 이에 따라 민심이 소란한 점 등을 들어 국가에 무익하다는 호패폐지론이 제기되었던 때문이었다. 이와는 달리 도적 및 백성의 유리(流離)를 방지할 수 있고 모든 백성의 신분과 직임을 밝힐 수 있으며, 호구를 장악해 군정을 확보할 수 있어 국가에 유익하므로 복구해야 한다는 호패실시론자들의 강력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다시 실시되고는 하였던 것이다. 한편, 호패제의 일환으로 승형(僧形)을 가장한 유역인(有役人), 공사천(公私賤)의 피역(避役) 방지, 도첩(度牒)이 없는 승려에게 일정한 국역을 마친 뒤 도첩과 호패를 발급해 주려는 세조의 호불책(護佛策)으로 1461년부터 승인호패제(僧人號牌制)가 실시되었다. 이 또한 그 실시 과정에서 호패제의 치폐, 국가의 호불·억불책, 무도첩승에 대한 대책과 승형을 가장한 피역, 수로를 내거나 성지(城池) 수축 등을 위한 요역자(法役者)의 확보책과 요역 부과에 대한 승려들의 반발 등과 관련해 여러 차례 치폐를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1469년 12월 폐지, 1536년(중종 31) 8월 실시, 1538년 12월 폐지, 1547년(명종 2) 2월 실시, 1550년 12월 폐지, 1610년 실시, 1612년 폐지, 1626년 1월 실시, 1627년 1월 폐지 등의 변천을 겪으면서 운영되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호패는 왕족·관인(官人)으로부터 양인·노비에 이르기까지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패용하였다. 그런데 그 재료, 기재 내용, 각인(刻印)의 위치, 주관 관서, 발급 순서, 호패법 위반자에 대한 처벌 규정 등은 신분이나 실시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 호패제가 처음 실시된 1413년부터 지속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한 1675년까지의 260여년 사이에 불과 18년간 실시되었다. 또한, 그나마 ≪세종실록≫에 호패를 받은 사람은 전체인구의 1, 2할이라 하고, ≪성종실록≫에는 호패를 받은 사람
1478
백자청화초문항아리(白磁靑畵草文壺)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항아리(항아리)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4119 / 000
상세설명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핬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백자청화(靑畵)는 유약을 입히기 전의 그릇 표면에 코발트계의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순백자와 마찬가지로 잡물의 함유가 전혀 없는 순도 높은 장석계 유약을 그 위에 씌워서 번조한 것이다. 코발트계의 안료는 페르시아 일대에서 일찍이 개발하여 사용한 것으로 아라비아 상인의 손을 거쳐 중국을 통해 수입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불렀으며 대단히 귀하게 여겼다. 이 백자항아리는 구연부(口緣部)는 직립하였고, 어깨에서부터 서서히 벌어져 내려와 동체부(胴體部) 중앙(中央)에서 최대경을 이루고 다시 좁아져 굽과 만나는 항아리(壺)이다. 동체(胴體)의 양쪽면에 초문(草文)을 시문하였고, 유(釉)는 담청을 머금은 백자유(白磁釉)를 시유하였다. 굽은 다리굽에 모래를 받치고 번조하였다. 굽주위가 일부 산화되었다.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핬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15세기경부터는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7세기경부터 주류를 이룬다. 그 외에 청자와 마찬가지로 상감백자, 철화백자 등의 종류가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백자는 청자보다 더 순수한(철분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은) 태토인 백토(高嶺土)를 이용하여 형태를 만들고 철분이 거의 포함되지 않은 무색투명의 장석질 유약을 입혀 1300℃ 이상의 고온에서 환원번조의 방식으로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백자병은 구연(口緣)은 나팔처럼 벌어지고, 좁아진 목에서 서서히 벌어져 내려가면서 동체(胴體)의 하부(下部)에서 풍만하게 배가 부르고 다시 좁혀져 세워진 병(甁)이다. 무문(無文)이며, 물레 성형 흔적이 남아있다. 회청색을 띠는 백자유(白磁釉)가 시유되었으나, 시유 상태가 고르지 못하며, 부분적으로 노태되어있다. 굽은 다리굽이며, 굽다리 바닥에 내화토를 바치고 번조하였다. 동체(胴體) 일부에 다른 기면(器面)의 파편이 붙어 있고, 구연(口緣)이 결실되었다. 기면(器面)이 고르지 못하다.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핬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15세기경부터는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7세기경부터 주류를 이룬다. 그 외에 청자와 마찬가지로 상감백자, 철화백자 등의 종류가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백자는 청자보다 더 순수한(철분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은) 태토인 백토(高嶺土)를 이용하여 형태를 만들고 철분이 거의 포함되지 않은 무색투명의 장석질 유약을 입혀 1300℃ 이상의 고온에서 환원번조의 방식으로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백자병은 구연(口緣)은 외반되었고, 가늘고 긴 목에 어깨에서부터 서서히 벌어져 내려가 중간쯤에서 최대로 팽창되었다가 다시 좁혀져 세워진 병이다. 무문(無文)이며 물레 성형 흔적이 남아 있다. 유색은 담청(淡靑)을 머금은 백자유(白磁釉)가 시유되었으나 시유상태가 고르지 못하다. 동체(胴體) 하부(下部)의 일부에 기포가 터져 있다. 굽은 접지면(接地面)을 향해 좁아든 다리굽으로 모래를 받치고 번조하였다. 구연이 일부 결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