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오봉 이호민(五峯 李好閔 1553~1634)의 문집(文集).
[인물]
오봉은 조선조 문신으로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남곽(南郭)·수와(睡窩), 본관은 연안(延安), 연안군(延安君) 숙기(淑琦)의 증손이다. 선조 12년(1579)에 진사(進士)가 되고, 158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사관(史官)으로 뽑히고 이어 응교(應敎)·전한(典翰)을 거쳐 집의(執義)로 응교(應敎)를 겸했다. 1592년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義州)에 왕을 호종(扈從), 그 후 요양(遼陽)에 가서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의 군대를 이끌어들이는 데 크게 활약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고 적서(嫡庶)의 구별 없이 장남을 등극시켜야 한다는 입장론(立長論)을 주장했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녔왔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 문외출송(門外黜送)당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와 향리에서 시주(詩酒)로 소일했다. 지예(知禮)의 도동향사(道東鄕祠)에 제향(祭享),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내용]
본서는 인조 15년(1636) 훈련도감자본(訓練都監字本)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15권과 부록을 합쳐 8책으로 구성되었는데, 본 소장본은 9~10권 1책인데, 수록 내용은 차(箚), 교서(敎書) 등이다
1249
백자청화난초문연적(白磁靑畵蘭草文硯滴)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주(住) 생활용품(生活用品) 문방구(文房具) 연적(硯滴)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2217 / 000
상세설명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핬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백자청화(靑畵)는 유약을 입히기 전의 그릇 표면에 코발트계의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순백자와 마찬가지로 잡물의 함유가 전혀 없는 순도 높은 장석계 유약을 그 위에 씌워서 번조한 것이다. 코발트계의 안료는 페르시아 일대에서 일찍이 개발하여 사용한 것으로 아라비아 상인의 손을 거쳐 중국을 통해 수입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불렀으며 대단히 귀하게 여겼다. 이 백자연적은 다각형(多角形)의 소형 연적으로 측면에 주구(注口)와 상면 중앙에 물구멍이 나있다. 상면은 둥글게 처리하고, 측면은 곧게 내려오다가 굽에 가까워지면서 내반되었다. 상면에만 청화안료(靑華顔料)를 사용하여 난초문(蘭草文)을 시문하였다. 유색은 담청(淡靑)을 머금은 백자유(白磁釉)로 고르게 시유하였다. 상면 한쪽측면이 약간 박리되었고, 주구가 약간 결실되었으나 완형이다.
1248
용두레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산업/생업(産業/生業) 농업(農業) 수리관개(水理灌漑) 용두레(용두레)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210 / 000
상세설명
[정의]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으로 퍼 올리는 데 쓰는 기구.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훈민정음해례 訓民正音解例≫의 '드레[汲器]'나 〈농가월령가〉의 '길고(桔楗)'는 용두레를 가리키는 말이다. 통두레(전라남도 영광)라고도 하며 파래·품개·풍개로 부르는 곳도 있다. 통나무를 배모양으로 길쭉하게 파서 몸통을 만들고, 그 가운데 양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 가는 나무를 끼우고 여기에 끈을 매었다. 이 끈은 세개의 긴 작대기를 원추형으로 모아 세운 꼭대기에 매어 몸통을 적당히 들어올리도록 한다. 한편, 몸통 끝에는 손잡이가 달려서 이것을 쥐고 앞뒤로 흔들며 물을 퍼올린다. 통나무가 귀한 곳에서는 쪽나무로 직사각형의 통을 짜고 바닥에 긴 자루를 달았다. 나무통 윗부분에는 들어온 물이 넘치지 않도록 드문드문 나무 조각을 가로댄다. 줄의 길이는 지형에 따라 조정한다. 용두레에는 보통 두말의 물이 실리는데, 두세 사람이 교대해가면서 푸면 하루에 약 1,000석(石)쯤 옮길 수 있다. 무게는 7㎏ 내외이다. 흔히 논 한귀퉁이에는 가뭄에 대비한 구덩이를 파고 물을 가두어두는데 이를 둔벙이라고 한다. 이 둔벙의 물은 어느 정도까지 용두레로 푸고 남은 것은 맞두레를 이용하여 퍼낸다.
1247
2층농(下)(二層籠(下))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주(住) 생활용품(生活用品) 가구(家具) 농(籠)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209 / 000
상세설명
[정의]
의류 및 기타 기물(器物)을 보관하는 나무상자.
[개념]
비(扮)·협(練)·광(堅) 등의 죽기(竹器)를 의미하였던 광주리에서 나온 말이다. 초기에는 뚜껑이 위에 있다가 점점 상자 앞면에 문을 달아 옷을 넣는 데 편리하게 하여 사용하다가 이를 포개어서 옷장으로 썼던 것 같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원래 농에는 개판(蓋板 : 맨 위에 댄 나무판)이 없는 것이 장(欌)과 다른 점이지만, 후에는 농에도 개판 혹은 다리부분인 마대(馬臺)를 붙여 이를 '개판농' 혹은 '마대농'이라고 불렀다. 또한 서민주택에서는 상자의 안팎에 종이를 바른 함롱(函籠)을 사용하였는데, 바닥에 놓고 썼기 때문에 그와같이 불려졌다. 구조는 널과 널로 접합된 것이 대부분이며, 그 짜임새는 한쪽 널에 촉을 만들고 다른쪽 널에 구멍을 뚫어 맞추는 촉짜임을 썼으며, 모서리는 각 이음새마다 고춧잎모양 혹은 기타 감잡이(양쪽으로 걸쳐 박는 쇳조각) 주석장식을 달아 견고하게 하였다. 또 문판 아래와 양쪽 널에 큰 달형 무쇠들쇠가 하나씩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후기에는 장과 같이 앞면에 쇠시리장식을 하여 미름칸 및 쥐벽칸을 나누었고, 내부는 층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외형은 한층으로 된 농도 만들어졌다. 농의 재료는 가볍고 좀이 안 스는 오동나무가 애용되었으며, 안방용인만큼 나뭇결이 아름다운 먹감나무·느티나무를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나전(螺鈿)이라든가 지롱(紙籠 : 초화문양을 그려 기름을 바른 것)·죽장롱(竹欌籠) 등도 애용되었다.
1246
2층농(上)(二層籠(上))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주(住) 생활용품(生活用品) 가구(家具) 농(籠)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208 / 000
상세설명
[정의]
의류 및 기타 기물(器物)을 보관하는 나무상자.
[개념]
비(扮)·협(練)·광(堅) 등의 죽기(竹器)를 의미하였던 광주리에서 나온 말이다. 초기에는 뚜껑이 위에 있다가 점점 상자 앞면에 문을 달아 옷을 넣는 데 편리하게 하여 사용하다가 이를 포개어서 옷장으로 썼던 것 같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원래 농에는 개판(蓋板 : 맨 위에 댄 나무판)이 없는 것이 장(欌)과 다른 점이지만, 후에는 농에도 개판 혹은 다리부분인 마대(馬臺)를 붙여 이를 '개판농' 혹은 '마대농'이라고 불렀다. 또한 서민주택에서는 상자의 안팎에 종이를 바른 함롱(函籠)을 사용하였는데, 바닥에 놓고 썼기 때문에 그와같이 불려졌다. 구조는 널과 널로 접합된 것이 대부분이며, 그 짜임새는 한쪽 널에 촉을 만들고 다른쪽 널에 구멍을 뚫어 맞추는 촉짜임을 썼으며, 모서리는 각 이음새마다 고춧잎모양 혹은 기타 감잡이(양쪽으로 걸쳐 박는 쇳조각) 주석장식을 달아 견고하게 하였다. 또 문판 아래와 양쪽 널에 큰 달형 무쇠들쇠가 하나씩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후기에는 장과 같이 앞면에 쇠시리장식을 하여 미름칸 및 쥐벽칸을 나누었고, 내부는 층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외형은 한층으로 된 농도 만들어졌다. 농의 재료는 가볍고 좀이 안 스는 오동나무가 애용되었으며, 안방용인만큼 나뭇결이 아름다운 먹감나무·느티나무를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나전(螺鈿)이라든가 지롱(紙籠 : 초화문양을 그려 기름을 바른 것)·죽장롱(竹欌籠) 등도 애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