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담배를 피우는 데 쓰이는 도구.
[역사]
한국에 담배가 들어온 시기는 1618년경이고, 담뱃대는 대일무역의 창구구실을 하였던 동래(東萊)에서 일찍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명성을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의 ≪오주연문장전산고≫나 ≪규합총서≫에서 동래연죽을 유명물산의 하나로 지목하였고, 〈춘향전〉에서도 "왜간죽 부산대에 담배를 너훌지게 담는다."는 구절이 보인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우리 나라의 옛 문헌에서는 연죽(煙竹)·연관(煙管)·연배(烟盃)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 연죽이 일반적이다. 담뱃대는 담배를 담아 불태우는 담배통과 입에 물고 빠는 물부리, 그리고 담배통과 물부리 사이를 연결하는 설대로 구성되어 있다. 담배통은 대꼬바리·꼬불통, 물부리는 물추리·빨부리 등으로 일컫기도 한다. 또, 설대가 긴 것은 장죽(長竹), 설대가 없거나 짧은 것은 곰방대[短竹]라 부른다. 담배가 우리 나라에 전하여진 것은 임진왜란 후 광해군 때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그 흡연구는 필연적으로 담배 보급 이후에 수반되었을 것이다. 담배는 일본을 통하여 들어온 까닭에 초기의 담뱃대는 역시 일본의 양식이 이식되는 형편이었을 것이다. 오래 된 양식의 담뱃대는 담배 담는 통이 작고 설대도 짧았다. 그러나 18세기 풍속도에 나오는 한국인의 담뱃대는 이미 장죽이 유행되었음을 볼 수 있다.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 의하면 조관들이 담배합과 담뱃대를 말 뒤에 달고 다닌다고 하면서, 비천한 사람들은 존귀한 분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서유구(徐有梏)는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에서 "전국에 걸쳐 다투어 사치하는 자들이 백통이나 오동(烏銅 : 검은빛이 나는 구리)으로 담뱃대를 만들뿐더러 금은으로 치장함으로써 쓸데없는 데 막대한 비용을 허비한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조선 말기의 담뱃대에 대한 사치풍조는 대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재 전통공예로서의 담뱃대가 백통을 기본으로 하여 오동과 금은으로 시문(施文)하고 있는 것과도 일치한다. 종래 담뱃대의 재료는 담배통의 경우 구리·놋쇠·백통을 쓰고 도자기로 된 것도 더러 썼으며, 물부리에 있어서는 쇠뿔·수정·호박·옥 등이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또, 설대는 자죽(紫竹)·반죽(斑竹)을 즐겨 썼으며, 특히 장죽에 있어서는 각죽(刻竹) 및 낙죽(烙竹)으로 치장하는 기법이 성행하였다. 서구식의 파이프는 19세기 무렵 함경도지방에 보급되었는데, 이를 목연통(木煙筒)이라 하였다.
1234
안경집(眼鏡匣)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의(衣) 장신구(裝身具) 의복장식(衣服裝飾) 안경집(안경집)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139 / 000
상세설명
[정의]
안경을 넣어 보관하는 물건.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안경을 보관하는 통으로 지승(紙繩)·나무·천·가죽·어피(魚皮)·종이 등과 헝겊에 길상문·화문 등을 수놓아 만들기도 한다. 안경집 끝에는 선추를 장식하기도 하였는데, 주로 허리춤에 달고 다녔다. 처음에는 주로 기능에만 충실했기 때문에 견고한 나무가 많이 쓰였다. 장식성이 강조가 되면서 안경집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어피(魚皮) 안경집이다. 그리고 안경집 끝에는 선추(扇錘)를 다는 일이 많았다. 선추는 방향을 보기 위한 자석을 장치한 것으로, 여기에 여름에 쓸 구급약을 굳혀 넣었다가 필요한 때에 갈아서 쓰는 일도 있었다.
1233
뒤주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뒤주(뒤주)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129 / 000
상세설명
[정의]
나무로 만든 곡식을 담는 궤(櫃).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통나무로 만들거나 널빤지를 짜서 만든다. 통나무로 만드는 것은 밑둥과 머리에 따로 널빤지를 대어 막고, 머리 부분의 한쪽을 열도록 문짝을 달아 낟알을 넣거나 퍼낸다. 널빤지를 짜서 만드는 뒤주는 네 기둥을 세우고 벽과 바닥을 널빤지로 마감하여 공간을 형성하고 머리에 천판(天板 : 천장을 이루는 널)을 설치한다. 천판은 두 짝으로 만들어 뒤편의 것은 붙박이로 하고 앞쪽으로 여닫는다. 여닫는 데는 쇠장석을 달아 자물쇠를 채운다. 또 네모반듯한 상자를 여러 개 만들어 차곡차곡 쌓고 그 위에 이엉을 덮어 만든 것도 있다. 이 밖에 네 기둥을 세우는 뒤주의 서너배 크기로 만들어, 기둥의 앞면에 따로 기둥을 세워 문벽선을 삼고, 그 문벽선에 물홈을 파고 널빤지를 드린 것도 있다. 이런 거대한 뒤주는 동화사(桐華寺)의 요사채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것을 한층 더 크게, 곳간만하게 만들어 마당 한쪽에 세우고 지붕을 이어 비바람을 가리게 하거나, 집의 한 끝에 따로 한칸을 설치하고 정면에 빈지 드린 문얼굴을 만들어 완성하기도 한다. 이것도 곡식을 수장하는 시설이라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뒤주라고 할 수 있다. 넓은 의미의 뒤주로는 버드나무 굵은 것이나 가는 싸리나무, 대나무오리를 써서 큰 독과 같은 형태로 엮은 것도 있다. 여기에 서까래를 걸고 이엉을 이어 초가처럼 꾸민다. 밑둥 한쪽에는 네모난 창을 내고 문을 닫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열어 낟알이 쏟아져 나오게 한다.
1232
광주리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광주리(광주리)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127 / 000
상세설명
[정의]
싸리채나 댓가지로 엮어 만든 부엌 세간.
[역사]
17세기에 간행된 ≪박통사언해≫에서는 광조릿디플[筐兒草]이라 하였고, ≪역어유해(譯語類解)≫에서는 삿광조리[席龍子]·대광조리[竹嵐子]·채광조리[荊筐]·드는 광조리[提籃] 등이 열거되었으며, 곡식씨 씻는 광조리[靑箱]라는 기록도 보인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농가에서는 주로 운반구로 쓰인다. 바닥을 판판하게 하여 울타리를 둥글게 엮으며 굽이 있다. 큰 것은 바닥지름이 65㎝에 달하고, 작은 것은 30㎝ 미만인 것도 있어서 반짇고리로 쓰일 정도이다. 광주리는 싸리채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소품에 있어서는 광대싸리 같은 유사재료를 활용하는 지방도 있고 혹은 대나무로도 만든다. 싸리는 그해에 곧게 자란 참싸리를 8월경에 베어 곧 껍질을 벗겨 쓰며, 가을 늦게 벤 것은 쪄내서 벗겨야 하는데 재질이 누런 기를 띠게 된다. 싸리제품에는 바구니·다래끼·채반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광주리겨르기가 가장 어려운 솜씨에 속하는 편이다. 역사적으로 광주리는 재료와 형태가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의 문헌에서는 광(筐)·비(扮)를 한결같이 광주리라 주석하였다. 또한, 농사짓는 도구로는 광주리에 끈을 매어 들기도 하였던 것 같으나, 요사이에는 머리에 이고 다니거나 음식물과 옷 등을 서늘하게 보관하는 그릇으로 용도가 제한되었다.
1231
광주리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광주리(광주리)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126 / 000
상세설명
[정의]
싸리채나 댓가지로 엮어 만든 부엌 세간.
[역사]
17세기에 간행된 ≪박통사언해≫에서는 광조릿디플[筐兒草]이라 하였고, ≪역어유해(譯語類解)≫에서는 삿광조리[席龍子]·대광조리[竹嵐子]·채광조리[荊筐]·드는 광조리[提籃] 등이 열거되었으며, 곡식씨 씻는 광조리[靑箱]라는 기록도 보인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농가에서는 주로 운반구로 쓰인다. 바닥을 판판하게 하여 울타리를 둥글게 엮으며 굽이 있다. 큰 것은 바닥지름이 65㎝에 달하고, 작은 것은 30㎝ 미만인 것도 있어서 반짇고리로 쓰일 정도이다. 광주리는 싸리채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소품에 있어서는 광대싸리 같은 유사재료를 활용하는 지방도 있고 혹은 대나무로도 만든다. 싸리는 그해에 곧게 자란 참싸리를 8월경에 베어 곧 껍질을 벗겨 쓰며, 가을 늦게 벤 것은 쪄내서 벗겨야 하는데 재질이 누런 기를 띠게 된다. 싸리제품에는 바구니·다래끼·채반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광주리겨르기가 가장 어려운 솜씨에 속하는 편이다. 역사적으로 광주리는 재료와 형태가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의 문헌에서는 광(筐)·비(扮)를 한결같이 광주리라 주석하였다. 또한, 농사짓는 도구로는 광주리에 끈을 매어 들기도 하였던 것 같으나, 요사이에는 머리에 이고 다니거나 음식물과 옷 등을 서늘하게 보관하는 그릇으로 용도가 제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