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등잔을 적당한 높이에 얹도록 한 일종의 등대(燈臺).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등은 어두운 곳을 밝히기 위하여 불을 켜는 데 필요한 도구로, 재료나 형태 또는 용도에 따라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름을 담아서 불을 켜는 등잔, 등잔을 얹어서 사용하는 등경(燈豈), 초를 꽂는 촛대, 들고 다니는 제등(提燈), 걸어놓는 괘등(掛燈), 실내에 놓는 좌등(坐燈)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들의 명칭과 형태는 다를지라도 기름불이나 촛불을 이용하도록 만든 구조는 공통된다. 이 등잔대는 등잔을 적당한 높이에 얹도록 한 일종의 등대로이다. 등경(燈檠)의 형태는 널짝한 하반에 서너개의 거치형 단급이 있는 등가(燈架)가 세워져 이 단급에 등잔걸이를 걸쳐 놓아 등잔이 안정감 있게 얹히도록 하였으며, 등잔 밑에는 우각형, 유방형, 타구형의 기름받이를 달아 놓은 것으로서 상하귀천의 구별 없이 가장 애용된 실내용 등기 양식이다. 청동·철·놋쇠·나무·도자기제가 있고, 하반경 20㎝ 내외, 높이 70㎝ 내외가 일반적인 크기이지만, 높이 120㎝ 정도의 대형등경도 있는데 이것은 제사용으로 사용되었으며, 하반경 10㎝ 내외, 높이 20㎝ 내외의 소형등경은 벽에 걸어 사용하였던 것으로 부엌에서 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부엌등이라고도 한다.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순백자는 아무 문양도 없는 순백의 백자를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음각문양의 백자가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속적되면서 가장 많고 12세기에는 양각, 반양각과 투각, 상형기법 등의 백자가 발전하여 전북 부안의 유천리 가마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백자보다 청자의 생산이 압도적이었으며, 경질백자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발전하여 17세기 후반부터는 거의 백자 일색으로 그중에도 순백자가 대부분이다. 이 백자병은 구연(口緣)은 각이져 세워지고, 가늘면서 짧은 목은 어깨에서 약간 꺽인 후 거의 직선(直線)에 가까울 정도로 볼륨감 없이 동체(胴體) 하부(下部)로 내려와 약간 배가 부른 다음 굽과 만난다. 기면(器面)은 물레 성형 자국이 남아 있고, 기포가 있는 회청색의 백자유(白磁釉)가 시유되었으나, 시유 상태가 고르지 못하다. 굽은 다리굽이며 굽안 바닥에 모래를 받치고 번조하였다.
428
약탕기(藥湯器)
한국(韓國)
석(石)
용도기능
과학기술(科學技術) 의료(醫療) 제약(製藥) 약탕기(藥湯器)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0607 / 000
상세설명
[정의]
약을 달이는 데 쓰는 의료용 그릇.
[개설]
약을 따르는 주둥이[注口]가 있는 것은 일반 약탕기와 구분하여 약탕관(藥湯罐)이라 한다.
[역사]
신석기시대 후기경부터 초보적인 약탕기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존하는 것이 드물고 이어 청동기·철기시대의 유물 가운데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신석기시대에는 무늬없는토기[無紋土器]나 빗살무늬토기[櫛紋土器]들 중 그릇의 벽이 두꺼운 것은 약탕기로 쓰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 뒤 초기 삼국시대의 토기들 가운데에는 끓이거나 데우는 데 썼던 그릇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지만, 꼭 약탕기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 때에는 끓이거나 삶는 것보다 한 단계 앞선 시기의 시루도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상당수의 청동제 초두(識斗:발이 셋 달리고 자루가 있는 남비)가 현존하고 있는데, 이는 약탕기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삼국시대 후기에는 일본 등지에서 삼국으로부터 각각 의약박사를 초빙하여 왕실의 질병을 고치고, 나아가 의약기술을 보급시켰다. 이로 미루어 당시의 의술과 약 다루는 기술이 매우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약탕기의 보급도 수준 높게 병행되었으리라 본다. 고려시대에는 철제·청자·흑유(黑釉)로 된 약탕기들이 요즘의 것과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오지·백자·곱돌 제품의 약탕기가 주종을 이루고, 청동과 철은 약탕기나 식기류로는 흔하게 사용되지 않았다. 이 점은 약물에 함유된 성분이 동이나 철을 만나면, 일종의 화학적 작용이 일어나 그 성질이 변하는 동시에 오히려 해독을 끼치거나 또는 약효를 감쇄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동이나 철 자체는 독성이 거의 없으나 그 녹이 소화기에 들어가면 두통·복통·오심·구토 등을 일으킨다는 것을 경험을 통하여 깨달았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약탕기로서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은기(銀器)이나, 은은 귀금속이므로 일반인들은 사용하기가 어려운 대신 오지나 곱돌[蠟石]약탕기가 널리 이용되었다. 특히, 곱돌제는 열전도율이 낮아 오래도록 끓이거나 삶아도 내용물이 잘 타지 않기 때문에 보약을 달이는 기구로 매우 좋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놋쇠약탕기(약두구리)도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강한 불에 급히 달여야 하는 발한제의 경우에 좋다. 인삼·녹용·범의 뼈[虎骨]·용치(龍齒)·해구신(海狗腎)·백출(白朮)·물소뿔[犀角] 등 보익(補益)의 약과 광물성 약은 오랫동안 끓여야 함유된 성분이 추출된다. 그러나 박하·계피·회향·사향(麝香) 같은 방향성 약재는 짧은 시간에 끓여야 하므로, 용기의 선택이나 연료가 중요시된다. 뚜껑이 없는 것은, 뚜껑 대신 여과성 창호지나 헝겊을 덮어서 수증기의 방출을 서서히 차단시켜 약재의 주성분이 밖으로 유실되거나 끓어 넘치는 것을 막기도 하고, 방향성 약재의 적당한 증발을 돕게 하였다. 연료는 시종 화력이 균일하고 센 숯이나 뽕나무 가지를 사용하였다. 근래에는 열에 강한 내열성 유리로 만든 전기식·전자식 약탕기까지 등장하여 끓임과 동시에 여과되는 것이 있다.
427
백자접시(白磁楪匙)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접시(접시)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0606 / 000
상세설명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순백자는 아무 문양도 없는 순백의 백자를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음각문양의 백자가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속적되면서 가장 많고 12세기에는 양각, 반양각과 투각, 상형기법 등의 백자가 발전하여 전북 부안의 유천리 가마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백자보다 청자의 생산이 압도적이었으며, 경질백자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발전하여 17세기 후반부터는 거의 백자 일색으로 그중에도 순백자가 대부분이다. 이 백자접시는 구연부(口緣部)는 외반되었고, 구연(口緣)에서 굽에 이르는 외측면선(外側面線)은 완만한 곡선(曲線)을 이루고 있다. 내면(內面)에는 커다란 내저원(內底圓)이 있고, 기면(器面)에는 물레 성형 흔적이 남아있다. 유색(釉色)은 담청(淡靑)을 머금은 백자유(白磁釉)가 시유되었으나 외면(外面) 일부 유(釉)가 박리(剝離)되었다. 굽은 다리굽으로, 굽다리 바닥에 내화토를 받치고 번조하였다. 내저면(內底面) 네 곳에 내화토를 받치고 포개 구은 흔적이 남아있다.
426
화첩(畵帖)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문화예술(文化藝術) 서화(書畵) 회화(繪畵) 일반회화(一般繪畵)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일반회화(一般繪畵)
유물번호
000604 / 000
상세설명
[정의]
비교적 작은 크기의 그림을 모아 책처럼 꾸민 것.
[개설]
첩(帖)은 책처럼 꾸며 한 장씩 낱장으로 넘겨서 보는 것으로 책항(冊頁) 또는 두방(斗方)이라고도 하는데, 주로 작은 크기의 작품들을 표구할 때 사용된다. 첩은 크게 세가지로 나뉘는데 위아래로 펼쳐볼 수 있는 추섭장(推摺裝), 좌우로 펼쳐볼 수 있는 호접장(胡蝶裝), 경전처람 접는 경섭장(經摺裝)이 그것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백운(白雲)의 호를 가진 인명미상(人名未詳)의 작품이다. 백운 선생이 직접 관동팔경(關東八景)과 금강산(金剛山) 등의 명승지를 두루 탐승하고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소상팔경(瀟湘八景)의 작품이 함께 실려 있다. 그 외에도 간찰(簡札)의 서식(書式)들이 그림 뒷면에 붙어 있는데, 후대에 와서 재편집된 것 같다. 조선 말기에서 근대초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은 관동지방(關東地方) 즉 강원도 동해안에 있는 여덟 군데 명승지를 말한다. 평해 월송정 대신에 흡곡의 시중대(侍中臺)를 넣기도 한다. 이를 영동팔경(嶺東八景)이라고도 한다. 이들 명승지는 관동지방의 수많은 명승지 중에서 특히 예로부터 손꼽혀 온 명승지로, 종래 강원도에 속했던 망양정과 월송정은 현재 경상북도에 편입되었고, 또 삼일포와 총석정은 북한지역에 들어 있다.
예로부터 금강산은 경관이 빼어난 산으로서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와 차원을 달리하는 이상향, 또는 불교적 성지나 신선이 사는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렇듯 민족의 영산(靈山)으로서 신앙적 동경의 대상이었던 금강산은 예술가들이 시나 그림으로 표현하기에 아주 적절한 소재였다. 또 예로부터 많은 화가들이 금강산 그림을 그리고 또, 그것을 감상하기를 즐겨했던 것은 미술 본연의 목적보다는 금강산이 지니고 있는 민족적·종교적 상징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소상팔경(瀟湘八景)은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소강(瀟江)과 상강(湘江)이 만나는 동정호(洞庭湖)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여덟 장면으로 그린 것이다. 소상야우(瀟湘夜雨)는 소강(瀟江)과 상강(湘江)이 만나는 지역에 밤비가 내리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동정추월(洞庭秋月)은 동정호에 달이 비치는 가을날의 정취를 묘사한 것이다. 원포귀범(遠浦歸帆)은 먼 바다에서 돌아오는 돛단배를 묘사한 것이다. 평사낙안(平沙落雁)은 모래사장에 사뿐히 내려앉는 기러기 떼를 묘사한 것이다. 연사모종(烟寺暮鍾)은 안개에 싸인 산 속의 절로부터 들려어는 저녁 종소리를 묘사한 장면으로 원사만종(遠寺晩鍾)이라고도 부른다. 어촌낙조(漁村落照)는 어촌의 저녁노을을 표현한 것이다. 강천모설(江天暮雪)은 강과 하늘에 내리는 저녁 눈을 묘사한 것이다. 산시청람(山市靑嵐)은 쾌청하고 아지랑이가 이는 봄철의 아침나절을 배경으로 산시(山市)를 표현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