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붓다(Buddha:佛陀)의 형상을 회화·조각 등의 조형형식으로 표현한 것.
[발달과정/역사]
불상을 조성하게 된 것은 부처가 어머니인 마야(摩耶)부인을 만나러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자 인도의 우진왕과 사사익왕이 부처를 사모하여 각각 향나무와 자마금[紫磨金:자색을 띤 황금]으로 그 형상을 만든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후세에 첨가된 내용으로 보고 있다. 불상은 불교 초기에는 만들어지지 않고 다만 부처의 전생 또는 일생 이야기와 관련있는 불탑(佛塔)이나 연화(蓮花), 보리수(菩提樹), 법륜[法輪:부처의 진리], 불족적[佛足跡:부처의 발자국], 금강좌[金剛座:부처가 성도할 때 앉은 자리] 등과 같은 상징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나 서기 1세기경에 이르러서 서방의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부처의 신상(神像)표현에 자극을 주게 되어 비로소 불상이 출현하게 되었다. 서구적인 얼굴에 두터운 법의(法衣)의 옷주름을 특색으로 하는 인도 서북부의 간다라 불상과 거의 동시에 중북부의 마투라 지방에서 성립된 것으로 몸에 착 달라붙은 듯한 옷에 순인도적인 얼굴을 한 불상형식은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 일본 등 여러 나라의 불상조형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삼국시대의 불상은 대체로 중국 남북조(南北朝)시대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하였다. 몸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며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있고 손과 다리의 조각표현에는 그다지 입체감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백제와 고신라의 불교 조각 전통 위에 새로이 수용되는 중국 당나라 및 인도, 서역과의 문화교류로 불교미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가장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불상의 중심지가 경주를 벗어나 지방 여러 곳에 선종사찰이 세워졌으며 동시에 지방호족들의 후원으로 불교조각도 지역적으로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탄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이른바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과 중국으로부터의 자극부재 등의 요인과 더불어 국가적인 후원이 줄어들어 불상은 전반적으로 쇠퇴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옛부터 뿌리깊게 내려오던 불교는 왕실이나 비빈들 사이에서 여전히 성행했으며 또 세조, 명종을 비롯한 역대 왕들의 개인적인 숭불태도 등으로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왕실이나 국가에서 불상을 조성하는 일이 많았다. 대체로 초기에는 고려시대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나 차츰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토착적인 성격이 강해지면서 주로 개인의 행복이나 내세를 위한 소규모의 불상제작과 개인용 불감(佛龕), 목각탱(木刻幀) 등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석조보살좌상은 강릉 사천면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보살좌상이다. 불상의 머리에는 육계는 없으나 나발이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얼굴은 신체에 비해 비교적 큰 편으로 둥글넓적하고 통통한 편이며, 귀는 크고 길며 눈썹과 수염은 먹선으로 하였다.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음각 원(圓)으로 표현되어 비교적 근엄한 모습을 보여준다. 짧은 목이 몸체에 붙어 있으며 삼도(三道)의 표현은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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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저(匙)
한국(韓國)
금속(金屬) 동합금제(銅合金製)
용도기능
과학기술(科學技術) 의료(醫療) 제약(製藥) 약시(藥匙)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0492 / 000
상세설명
[정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아울러 이르는 말, 또는 상대방을 높이어 그의 숟가락을 이르는 말.
[발달과정/역사]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숟가락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나진초도패총에서 출토된 골제품(骨製品)이다. 중국에서는 서기전 10∼6세기경의 가요를 모은 ≪시경≫에 처음 기록이 나온다. 일본에서는 서기전 3세기경의 유적지에서 출토되었다. 젓가락은 우리 나라에서는 공주무녕왕릉에서 출토되었다.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서기전 403∼221년)에 비로소 기록이 나온다. 그러므로 젓가락은 숟가락에 비하여 늦게 발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 나라에서 수저를 병용한 것은 삼국시대였다. 중국·일본에서도 시기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수저를 병용하였다. 그러다가 중국·일본에서는 점차 숟가락의 이용이 줄어들고 젓가락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병용하는 관습은 우리 나라의 독특한 관습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병용하면서 식사하는 관습이 전통을 이루게 된 것은 우리 일상식의 내용이 국물음식과 국물이 없는 음식을 항상 병용하게끔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수저는 상고시대에는 주로 청동제품이었다. 이어서 놋쇠제품·백통제품·은제품으로 변천되었다. 형태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 고려 초기의 것은 숟가락의 자루가 크게 휘어졌다. 중기의 것은 자루 끝이 제비꼬리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들어서면서 숟가락자루의 제비꼬리가 없어지고 자루의 휨이 적어진다. 숟가락 면은 나뭇잎과 같은 타원형을 이룬다. 수저는 고려 중기 이후에는 숟가락자루가 길어지고 두꺼워지며 곧아진다. 숟가락 면은 둥글어진다. 젓가락은 한쪽이 점차 가늘어져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이루게 된다. 수저의 윗부분에는 장식으로 길한 의미의 글자나 꽃을 칠보로 입히는 경우가 많다. 수저의 사용은 숟가락이 주가 된다. 국물뿐만 아니라 밥도 숟가락으로 먹는 것이 정식이다. 숟가락을 손에 쥐면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밥상에 놓지 말아야 한다. 젓가락을 쓸 때에는 숟가락을 밥그릇이나 국그릇에 걸쳐둔다. 젓가락을 쓰지 않을 때는 밥상에 눕혀두어도 좋다. 젓가락의 용도는 반찬을 집는 데에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어린이의 첫돌날에 아기의 개인용 수저를 준비하여 주는 풍습이 있다. 성장하면 연령에 맞추어 큰 것으로 바꾸어 주고 혼인할 때에 신부가 신랑·신부 두 사람의 수저를 밥그릇·대접과 함께 준비하여 거의 평생을 쓴다. 따라서 각기 개인용 수저가 있으며 접객용 수저는 따로 준비한다. 이와 같이 수저는 우리 식문화의 저변적 특성을 형성하는 한 요소이며,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는 깊은 뜻의 식사용구이다. 이 숟가락은 한방에서 쓰는 작은 수저로 가루 약을 떠 담는 기구이다. 자루 끝에는 아주 작은 시면을 부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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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저(藥匙)
한국(韓國)
금속(金屬) 복합금속(復合金屬)
용도기능
과학기술(科學技術) 의료(醫療) 제약(製藥) 약시(藥匙)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0490 / 000
상세설명
[정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아울러 이르는 말, 또는 상대방을 높이어 그의 숟가락을 이르는 말.
[발달과정/역사]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숟가락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나진초도패총에서 출토된 골제품(骨製品)이다. 중국에서는 서기전 10∼6세기경의 가요를 모은 ≪시경≫에 처음 기록이 나온다. 일본에서는 서기전 3세기경의 유적지에서 출토되었다. 젓가락은 우리 나라에서는 공주무녕왕릉에서 출토되었다.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서기전 403∼221년)에 비로소 기록이 나온다. 그러므로 젓가락은 숟가락에 비하여 늦게 발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 나라에서 수저를 병용한 것은 삼국시대였다. 중국·일본에서도 시기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수저를 병용하였다. 그러다가 중국·일본에서는 점차 숟가락의 이용이 줄어들고 젓가락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병용하는 관습은 우리 나라의 독특한 관습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병용하면서 식사하는 관습이 전통을 이루게 된 것은 우리 일상식의 내용이 국물음식과 국물이 없는 음식을 항상 병용하게끔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수저는 상고시대에는 주로 청동제품이었다. 이어서 놋쇠제품·백통제품·은제품으로 변천되었다. 형태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 고려 초기의 것은 숟가락의 자루가 크게 휘어졌다. 중기의 것은 자루 끝이 제비꼬리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들어서면서 숟가락자루의 제비꼬리가 없어지고 자루의 휨이 적어진다. 숟가락 면은 나뭇잎과 같은 타원형을 이룬다. 수저는 고려 중기 이후에는 숟가락자루가 길어지고 두꺼워지며 곧아진다. 숟가락 면은 둥글어진다. 젓가락은 한쪽이 점차 가늘어져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이루게 된다. 수저의 윗부분에는 장식으로 길한 의미의 글자나 꽃을 칠보로 입히는 경우가 많다. 수저의 사용은 숟가락이 주가 된다. 국물뿐만 아니라 밥도 숟가락으로 먹는 것이 정식이다. 숟가락을 손에 쥐면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밥상에 놓지 말아야 한다. 젓가락을 쓸 때에는 숟가락을 밥그릇이나 국그릇에 걸쳐둔다. 젓가락을 쓰지 않을 때는 밥상에 눕혀두어도 좋다. 젓가락의 용도는 반찬을 집는 데에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어린이의 첫돌날에 아기의 개인용 수저를 준비하여 주는 풍습이 있다. 성장하면 연령에 맞추어 큰 것으로 바꾸어 주고 혼인할 때에 신부가 신랑·신부 두 사람의 수저를 밥그릇·대접과 함께 준비하여 거의 평생을 쓴다. 따라서 각기 개인용 수저가 있으며 접객용 수저는 따로 준비한다. 이와 같이 수저는 우리 식문화의 저변적 특성을 형성하는 한 요소이며,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는 깊은 뜻의 식사용구이다. 이 숟가락은 한방에서 쓰는 작은 수저로 가루 약을 떠 담는 기구이다. 자루 끝에는 아주 작은 시면을 부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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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단지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단지(단지)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0486 / 000
상세설명
[정의]
양념이란 음식의 맛과 향을 돋구기 위하여 사용하는 재료를 총칭하는 말로써 일명 조미료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것을 담아서 사용하거나 보관하는 용기를 양념단지라고 한다. 양념이 지니는 좋은 향기나 맛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데는 담는 용기에 따라 그 맛과 향이 다르다.
[발달과정/역사]
삼국시대부터 옹기로 만들어진 그릇을 생활도로고 사용하여 왔는데 그 중에서 양념단지로 보이는 용기로는 기원후 8세기의 쌍단지가 있다. 1981년 서울대학교 고고학과 주관으로 발굴작업이 이루어진 몽촌토성 유적지에서 각종 토기와 함께 출토된 검정색의 쌍단지는 오늘날 우리가 양념단지로 사용하고 있는 쌍단지와 비교하여 전체적인 모양과 단지의 연결고리 기법, 구연부, 외전, 크기 등 우리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많이 닮았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소금, 깨, 고추가루, 마늘쪽 등 수분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양념을 주로 넣어서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던 양념단지는 일단지, 이단지, 삼단지, 사단지, 오단지, 육단지 등 그 규모가 크고 작은 것들이 잇으며 보통은 옹기제품이 대부분이고, 오지, 질 등의 순서로 제품들이 있다. 단지와 단지는 짝을 지어 평행연결고리로 이어지고 손잡이로 반원 띠를 만들어서 적당한 간격으로 연결고리를 부착하였으며 돌출 매화점을 찍어 전체적으로 하나의 그릇을 형성하였다. 가끔 세개의 오죽(烏竹)을 원뿔형으로 세워서 손잡이로 사용한 고급품도 있다. 특이한 것으로 4개의 단지를 사각으로 평행 연결하고 그 위에 하나를 더 올려만든 오단지는 조선시대의 가부장적 유교사상과 가화만사성의 가훈적인 의미가 깃들여 있어 당시 양반사회의 가정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흥미롭다. 이 양념단지는 두개의 작은 단지를 연결하고 중간에 손잡이를 달았다. 감재비로 외반된 아가리를 마련하고 짧은 목에 어깨에서 배에 이르기까지 팽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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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단지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단지(단지)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0485 / 000
상세설명
[정의]
양념이란 음식의 맛과 향을 돋구기 위하여 사용하는 재료를 총칭하는 말로써 일명 조미료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것을 담아서 사용하거나 보관하는 용기를 양념단지라고 한다. 양념이 지니는 좋은 향기나 맛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데는 담는 용기에 따라 그 맛과 향이 다르다.
[발달과정/역사]
삼국시대부터 옹기로 만들어진 그릇을 생활도로고 사용하여 왔는데 그 중에서 양념단지로 보이는 용기로는 기원후 8세기의 쌍단지가 있다. 1981년 서울대학교 고고학과 주관으로 발굴작업이 이루어진 몽촌토성 유적지에서 각종 토기와 함께 출토된 검정색의 쌍단지는 오늘날 우리가 양념단지로 사용하고 있는 쌍단지와 비교하여 전체적인 모양과 단지의 연결고리 기법, 구연부, 외전, 크기 등 우리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많이 닮았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소금, 깨, 고추가루, 마늘쪽 등 수분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양념을 주로 넣어서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던 양념단지는 일단지, 이단지, 삼단지, 사단지, 오단지, 육단지 등 그 규모가 크고 작은 것들이 잇으며 보통은 옹기제품이 대부분이고, 오지, 질 등의 순서로 제품들이 있다. 단지와 단지는 짝을 지어 평행연결고리로 이어지고 손잡이로 반원 띠를 만들어서 적당한 간격으로 연결고리를 부착하였으며 돌출 매화점을 찍어 전체적으로 하나의 그릇을 형성하였다. 가끔 세개의 오죽(烏竹)을 원뿔형으로 세워서 손잡이로 사용한 고급품도 있다. 특이한 것으로 4개의 단지를 사각으로 평행 연결하고 그 위에 하나를 더 올려만든 오단지는 조선시대의 가부장적 유교사상과 가화만사성의 가훈적인 의미가 깃들여 있어 당시 양반사회의 가정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흥미롭다. 이 양념단지는 두 개의 단지를 연결시킨 이단지로, 감재비로 외반된 아가리를 마련하고 짧은 목에 어깨에서 배에 이르기까지 팽창하였다. 이 양념단지는 두개의 작은 단지를 연결하고 중간에 끈으로 매달수 있도록 구멍을 뚫었다. 감재비로 외반된 아가리를 마련하고 짧은 목에 어깨에서 배에 이르기까지 팽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