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석간주(石間硃)란 붉은 산화철을 많이 포함한 빛이 붉은 흙으로, 석회암, 혈암 등이 분해된 돌 사이에서 나는 흙으로 주토(朱土), 적토(赤土) 등으로 불여진다. 이 산화철을 안료로 하여 백자의 태토 위에 시유하여 철색, 고동색빛 색깔을 내는 자기를 조선시대 18세기에는 '석간주'라고 하였다.
[발달과정/역사]
석간주 자기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철화백자, 철채백자가 많이 제작되는 17세기 후반 무렵부터 비롯하여 18, 19세기에 널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동체에 8각 또는 10각의 면을 깎아 세우고 접시 모양의 뚜껑이 있는 전형적인 석간주라고 불려지는 단지들은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호남·영남 일대의 백자 가마터에서 백자와 함께 특별히 제작되었던 철채자기로 알려져 왔다. 단지모양의 몸체에 이처럼 다각으로 모를 깎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전반 광주의 금사리요에서 백자단지나 병 그리고 제기 등을 만든 데서 비롯하며, 이러한 다각의 단지는 19세기에 들어 병이나 제기, 단지 등에 더욱 확대되어 제작되며, 이러한 다각의 단지 외에도 다각 병, 술병, 작은 병, 단지, 주구(注口)가 달린 단지, 광구병 등에도 널리 사용되어 제작되기에 이르른다. 흑(갈)유 자기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후반까지 오랜 기간 제작되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석간주 자기의 특색은, 다각의 단지의 경우 그 특이한 조형감각에 있으며, 동체를 모로 깎은 예리함과 다각이 주는 강건한 효과가 변형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접시 모양의 뚜껑이 잘 어울리며, 꿀이나 양념 등을 담아 주방에서 생활용에 긴요하게 사용되었으며, 병들의 경우도 기름이나, 간장, 술 등을 담는 데 요긴하게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석간주 자기의 굽다리는 특이하게 18세기 백자의 저부의 면과 굽 안바닥의 면이 같은 점이 주목되며, 태토는 반자기질이나 백자 태토를 사용하고 있다. 유색은 짙은 경우 흑색, 흑갈색을 띠거나, 옅은 경우 엿빛 색깔을 띠며, 일반적으로 산화된 붉은 색을 띠고 있다. 유약은 전면에 곱게 시유되거나 반점을 이루어 얼룩얼룩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병은 동체가 풍만하고 굽다리가 굽 안바닥으로 깊어져 19~20세기의 기형을 따르고 있다. 이 석간주단지는 구부(口部)가 낮고 직립(直立)되어 있으며 어깨에서부터 벌어져 동체(胴體) 상부(上部)에서 중심을 이루다 둥근 곡선을 이루며 좁혀져 세워진 단지이다. 기면(器面)에는 물레의 회전자국이 남아 있으며, 황갈색의 석간주 유약이 흘러 내리거나 응어리져 고르지 않게 시유되어 있다. 굽바닥은 평저(平底)이며 안으로 오목하게 들어 갔고, 굽 주위는 시유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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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간주단지(石間硃壺)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석간주(石間朱)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단지(단지)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0441 / 000
상세설명
[정의]
석간주(石間硃)란 붉은 산화철을 많이 포함한 빛이 붉은 흙으로, 석회암, 혈암 등이 분해된 돌 사이에서 나는 흙으로 주토(朱土), 적토(赤土) 등으로 불여진다. 이 산화철을 안료로 하여 백자의 태토 위에 시유하여 철색, 고동색빛 색깔을 내는 자기를 조선시대 18세기에는 '석간주'라고 하였다.
[발달과정/역사]
석간주 자기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철화백자, 철채백자가 많이 제작되는 17세기 후반 무렵부터 비롯하여 18, 19세기에 널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동체에 8각 또는 10각의 면을 깎아 세우고 접시 모양의 뚜껑이 있는 전형적인 석간주라고 불려지는 단지들은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호남·영남 일대의 백자 가마터에서 백자와 함께 특별히 제작되었던 철채자기로 알려져 왔다. 단지모양의 몸체에 이처럼 다각으로 모를 깎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전반 광주의 금사리요에서 백자단지나 병 그리고 제기 등을 만든 데서 비롯하며, 이러한 다각의 단지는 19세기에 들어 병이나 제기, 단지 등에 더욱 확대되어 제작되며, 이러한 다각의 단지 외에도 다각 병, 술병, 작은 병, 단지, 주구(注口)가 달린 단지, 광구병 등에도 널리 사용되어 제작되기에 이르른다. 흑(갈)유 자기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후반까지 오랜 기간 제작되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석간주 자기의 특색은, 다각의 단지의 경우 그 특이한 조형감각에 있으며, 동체를 모로 깎은 예리함과 다각이 주는 강건한 효과가 변형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접시 모양의 뚜껑이 잘 어울리며, 꿀이나 양념 등을 담아 주방에서 생활용에 긴요하게 사용되었으며, 병들의 경우도 기름이나, 간장, 술 등을 담는 데 요긴하게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석간주 자기의 굽다리는 특이하게 18세기 백자의 저부의 면과 굽 안바닥의 면이 같은 점이 주목되며, 태토는 반자기질이나 백자 태토를 사용하고 있다. 유색은 짙은 경우 흑색, 흑갈색을 띠거나, 옅은 경우 엿빛 색깔을 띠며, 일반적으로 산화된 붉은 색을 띠고 있다. 유약은 전면에 곱게 시유되거나 반점을 이루어 얼룩얼룩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병은 동체가 풍만하고 굽다리가 굽 안바닥으로 깊어져 19~20세기의 기형을 따르고 있다. 이 석간주단지는 구부(口部)가 낮고 직립(直立)되어 있으며 어깨에서부터 벌어져 동체(胴體) 상부(上部)에서 중심을 이루다 둥근 곡선을 이루며 좁혀져 세워진 단지이다. 기면(器面)에는 물레의 회전자국이 남아 있으며, 짙고 옅은 황갈색의 석간주 유약이 시유되었다. 굽 바닥은 평저(平底)이며 안으로 오목하게 들어 갔고 굽 주위는 시유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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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간주다각단지(石間硃多角壺)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석간주(石間朱)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단지(단지)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0440 / 000
상세설명
[정의]
석간주(石間硃)란 붉은 산화철을 많이 포함한 빛이 붉은 흙으로, 석회암, 혈암 등이 분해된 돌 사이에서 나는 흙으로 주토(朱土), 적토(赤土) 등으로 불여진다. 이 산화철을 안료로 하여 백자의 태토 위에 시유하여 철색, 고동색빛 색깔을 내는 자기를 조선시대 18세기에는 '석간주'라고 하였다.
[발달과정/역사]
석간주 자기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철화백자, 철채백자가 많이 제작되는 17세기 후반 무렵부터 비롯하여 18, 19세기에 널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동체에 8각 또는 10각의 면을 깎아 세우고 접시 모양의 뚜껑이 있는 전형적인 석간주라고 불려지는 단지들은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호남·영남 일대의 백자 가마터에서 백자와 함께 특별히 제작되었던 철채자기로 알려져 왔다. 단지모양의 몸체에 이처럼 다각으로 모를 깎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전반 광주의 금사리요에서 백자단지나 병 그리고 제기 등을 만든 데서 비롯하며, 이러한 다각의 단지는 19세기에 들어 병이나 제기, 단지 등에 더욱 확대되어 제작되며, 이러한 다각의 단지 외에도 다각 병, 술병, 작은 병, 단지, 주구(注口)가 달린 단지, 광구병 등에도 널리 사용되어 제작되기에 이르른다. 흑(갈)유 자기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후반까지 오랜 기간 제작되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석간주 자기의 특색은, 다각의 단지의 경우 그 특이한 조형감각에 있으며, 동체를 모로 깎은 예리함과 다각이 주는 강건한 효과가 변형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접시 모양의 뚜껑이 잘 어울리며, 꿀이나 양념 등을 담아 주방에서 생활용에 긴요하게 사용되었으며, 병들의 경우도 기름이나, 간장, 술 등을 담는 데 요긴하게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석간주 자기의 굽다리는 특이하게 18세기 백자의 저부의 면과 굽 안바닥의 면이 같은 점이 주목되며, 태토는 반자기질이나 백자 태토를 사용하고 있다. 유색은 짙은 경우 흑색, 흑갈색을 띠거나, 옅은 경우 엿빛 색깔을 띠며, 일반적으로 산화된 붉은 색을 띠고 있다. 유약은 전면에 곱게 시유되거나 반점을 이루어 얼룩얼룩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병은 동체가 풍만하고 굽다리가 굽 안바닥으로 깊어져 19~20세기의 기형을 따르고 있다. 이 석간주다각단지는 구부(口部)가 낮고 직립(直立)되어 있으며 어깨에서 크게 벌어져 동상부(胴上部)에서 중심을 이루면서 각이져 좁혀진 동부(胴部), 11면(面)의 위아래로 넓직한 각면(角面)을 이룬 단지이다. 전면에 물레의 회전자국과 흑갈색의 석간주 유약이 시유되었으나 흘러 내렸으며, 굽안바닥에 모래 등을 받쳐 구운 흔적이 남아 있다.
[정의]
석간주(石間硃)란 붉은 산화철을 많이 포함한 빛이 붉은 흙으로, 석회암, 혈암 등이 분해된 돌 사이에서 나는 흙으로 주토(朱土), 적토(赤土) 등으로 불여진다. 이 산화철을 안료로 하여 백자의 태토 위에 시유하여 철색, 고동색빛 색깔을 내는 자기를 조선시대 18세기에는 '석간주'라고 하였다. 석간주 자기란 철채자기를 뜻하는 것으로 주로 백자 태토나 반자기질의 태토를 사용하여 제작되며, 기면 전체에 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발달과정/역사]
석간주 자기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철화백자, 철채백자가 많이 제작되는 17세기 후반 무렵부터 비롯하여 18, 19세기에 널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동체에 8각 또는 10각의 면을 깎아 세우고 접시 모양의 뚜껑이 있는 전형적인 석간주라고 불려지는 단지들은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호남·영남 일대의 백자 가마터에서 백자와 함께 특별히 제작되었던 철채자기로 알려져 왔다. 단지모양의 몸체에 이처럼 다각으로 모를 깎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전반 광주의 금사리요에서 백자단지나 병 그리고 제기 등을 만든 데서 비롯하며, 이러한 다각의 단지는 19세기에 들어 병이나 제기, 단지 등에 더욱 확대되어 제작되며, 이러한 다각의 단지 외에도 다각 병, 술병, 작은 병, 단지, 주구(注口)가 달린 단지, 광구병 등에도 널리 사용되어 제작되기에 이르른다. 흑(갈)유 자기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후반까지 오랜 기간 제작되었다. 대개 이들은 녹청자와 같은 가마(窯)에서 생산된 경우가 많아 어떤 것은 녹청자와 구별하기 어련운 것도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석간주 자기의 특색은, 다각의 단지의 경우 그 특이한 조형감각에 있으며, 동체를 모로 깎은 예리함과 다각이 주는 강건한 효과가 변형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접시 모양의 뚜껑이 잘 어울리며, 꿀이나 양념 등을 담아 주방에서 생활용에 긴요하게 사용되었으며, 병들의 경우도 기름이나, 간장, 술 등을 담는 데 요긴하게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석간주 자기의 굽다리는 특이하게 18세기 백자의 저부의 면과 굽 안바닥의 면이 같은 점이 주목되며, 태토는 반자기질이나 백자 태토를 사용하고 있다. 유색은 짙은 경우 흑색, 흑갈색을 띠거나, 옅은 경우 엿빛 색깔을 띠며, 일반적으로 산화된 붉은 색을 띠고 있다. 유약은 전면에 곱게 시유되거나 반점을 이루어 얼룩얼룩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병은 동체가 풍만하고 굽다리가 굽 안바닥으로 깊어져 19~20세기의 기형을 따르고 있다. 석간주 자기는 철채자기라고 할 수 있으며, 꿀이나 양념, 기름이나 술 등을 담아 사용하던 생활용의 자기로서 17세기 후반부터 철화백자와 함께 만들어졌으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걸쳐 석간주 자기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다각의 단지와 다각의 병 등이 석간주 자기로 만들어져 널리 주방영의 생활용 자기로 사용되어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르렀던 조선 후기의 특수한 자기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석간주병은 구부는 나팔처럼 벌어져 있고 좁아진 목에 어깨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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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막신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의(衣) 신발(신발) 혜/리(鞋/履) 나막신(나막신)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0436 / 000
상세설명
[정의]
비가 올 때 신던 나무로 만든 신.
[개설]
나무를 파서 만든 신. 격지·목극(木珖)·각색(脚龍)·목리(木履)·목혜(木鞋)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 말기에 나막신으로 통칭되었는데, 이는 '나무신'이 와전된 것이다. 지방에 따라 나막개·나모께·나무신·목신·남신·나막개짝·토막신·껏두기·미엉·남박신·나묵신·나묵개·나맥신·나목신·나목개 등 다양하게 불린다. 나막신은 주로 비올 때 신는 신발로서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
고대에도 있었는지는 확증할 문헌이나 유물이 없고, 조선 중기 이후에 많은 기록과 유물을 볼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나막신이 처음 나타났을 때의 형태를 알 수는 없으나 처음에는 평판(平板)에 끈을 하였던 것이 차츰 사방에 울을 하게 되고, 굽을 달아 극(珖)의 형식으로 발달하여 요즈음 볼 수 있는 나막신으로 변하였다. 이와 같이 평극에 울과 굽을 다는 형식으로 된 것은 비올 때에 발에 물이나 진흙이 튀어 들어가는 불편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막신의 형태를 보면 평극, 굽이 있는 것, 굽이 없는 것, 굽에 징이 박힌 것 등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남자아이가 신는 무늬 있는 것〔彩珖〕등이 있었고, 평극은 보이지 않는다. 재료는 다양하게 사용되었는데 특히 오동나무와 버드나무로 만든 것을 제일로 쳤다. 나무의 속성이 마르면 터지기 쉬우므로, 밀납을 녹여 겉에다 칠해서 납극(蠟珖)을 만들어 신기도 하였다. 나막신은 상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신었는데 굽이 높아서 비나 눈이 올 때는 좋으나, 무겁고 활동적이 못 되어 말을 탈 때나 먼길을 갈 때는 신지 않았다. 맑은 날에도 많이 신었으며, 특히 어린 남자아이가 신었던 채극은 진신으로서뿐만 아니라 마른신으로도 신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나막신을 신고 소리내어 지나가는 것이 오만하다고 하여, 천인이나 젊은이는 양반이나 어른 앞에서는 감히 착용할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말에는 청빈한 선비의 신처럼 여겨졌는데, 양반은 가난하더라도 상민처럼 짚신이나 미투리 같은 것은 절대로 신지 않았으므로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가난한 선비가 많이 살았던 것으로 이름난 남산골의 선비들이 그러하였다 하여 이들을 '남산골 딸깍발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렇듯 널리 신겨지다가 1910년 이후 고무신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고 질긴 고무신을 신게 되어 차츰 쇠퇴하여, 1940년대를 전후하여서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