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소개
-
유물해설
와당은 지붕에 평기와를 올린 후 기왓등과 기왓골의 끝부분을 막음하는 역할을 하는 기와를 말한다. 기왓골의 끝을 막음하는 호형(弧形)의 기와를 암막새라 하고, 기왓등의 끝을 막음하는 원형(圓形)의 기와를 수막새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와당 기술이 발전되어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구려 기와는 선이 굵고 문양의 볼륨감이 강하여 전체적으로 강경한 인상을 주고 있다. 고구려 기와는 신라와 백제에도 영향을 주어 고대 우리나라의 기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백제는 6세기 후반까지는 꽃잎의 끝을 돌기 모양으로 표현하여 가볍게 반전시킨 연화문수막새와 비슷한 유형이 유행하였으나, 7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는 꽃잎의 끝이 삼각형으로 변하거나 꽃잎의 끝이 구부러져 각을 이루며 꺾이는 변화가 나타난다. 신라는 6세기 초반과 중반을 전후하여 고구려와 백제 기와의 영향을 받아들여, 양식적으로 서로 다른 이들 두 계통을 복합하는 과정을 거쳐 6세기 후반부터 신라만의 독자적인 수막새 양식을 확립하였다. 신라시대 수막새는 전체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투박함을 지니고 있다.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와당의 문양은 매우 다양하여 연꽃무늬(蓮花文)를 비롯한 당초문(唐草文)․ 인동무늬(忍冬文)․ 도깨비무늬(鬼面瓦)․ 사자무늬(獅子文)․ 보상화무늬(寶相華文)․ 사람얼굴무늬(人面文) 등이 유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신라양식을 계승한 당초무늬(唐草文)계의 문양이 시문되지만 형태의 변화와 함께 귀목무늬(鬼目文)의 와당이 등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화문(花文)․ 용(龍) 등이 조각되고 제작연월일 또는 제작연유, 제작관계자 성명 등의 문자가 새겨진 와당이 특색을 이루게 되었다.
사진의 당초문암막새는 강릉 학산리 굴산사지에서 출토된 당초문암막새이다. 상하로 좁은 테두리(周緣)가 있고 막새면에 당초무늬(唐草文)가 좌우대칭으로 새겨졌다. 테두리에는 작은 구슬무늬(蓮珠文)가 둘러져 있다. 일부 결실되었다.
2009년 9월의 유물 [고고편] 당초문암막새(唐草文平瓦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