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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이미지 유물명 국적/시대 재질 상세보기
1405 매월당집(梅月當集)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문화예술(文化藝術) 문헌(文獻) 문집류(文集類) 문집류(文集類)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유물번호 003633 / 000
상세설명 [정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 문집(文集).
[인물]
매월당은 조선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췌세옹(贅世翁), 본관은 강릉(江陵), 시중(侍中) 태현(台鉉)의 후손이다. 3세에 이미 시(試)에 능했고, 5세엔 《중용(中庸)》·《대학(大學)》에 통하여 신동(神童)으로 이름났다. 5세에서 13세까지 김반(金泮)의 문하에서《공자》·《맹자》·시경(詩經)》·《서경(書經)》·《춘추(春秋)》를, 윤상(尹祥)에게서 《예서(禮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웠다. 1455년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1458년《탕유관서록후지(宕遊關西錄後志)》를, 1460년에《탕유관동록후지》를 썼으며, 1463년에는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 이 해에 책을 사러 서울에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의 일을 맡았으며, 1465년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독서를 시작하고,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원각사(圓覺寺) 낙성식에 참석했다. 1468년 금오산에서《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고, 1476년에《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지었다. 1481년 47세에 환속(還俗) 1485년《독산원기(禿山院記)》를 썼다. 절개를 지키면서 불교·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1782년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제향(祭享)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내용]
이산해(李山海 1538~1609)가 초간본 서문(序文)를 찬(撰)하였으며, 1927년에 중간(重刊) 되었다. 중간본 발문은 후손 주사(主事) 김봉기(金鳳起)가 지었다. 시(詩), 만사(輓詞), 잡시(雜詩), 유관서록(遊關西錄), 유관동록(遊關東錄), 유호남록(遊湖南錄), 유금오록(遊金鰲錄), 관동일록(關東日錄), 명주일록(溟州日錄)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6책에는 기문(記文), 사적기(事蹟記), 비명(碑銘) 등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현재 소장본은 5책이 누락되어 있다.
1404 매월당집(梅月當集)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문화예술(文化藝術) 문헌(文獻) 문집류(文集類) 문집류(文集類)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유물번호 003632 / 000
상세설명 [정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 문집(文集).
[인물]
매월당은 조선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췌세옹(贅世翁), 본관은 강릉(江陵), 시중(侍中) 태현(台鉉)의 후손이다. 3세에 이미 시(試)에 능했고, 5세엔 《중용(中庸)》·《대학(大學)》에 통하여 신동(神童)으로 이름났다. 5세에서 13세까지 김반(金泮)의 문하에서《공자》·《맹자》·시경(詩經)》·《서경(書經)》·《춘추(春秋)》를, 윤상(尹祥)에게서 《예서(禮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웠다. 1455년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1458년《탕유관서록후지(宕遊關西錄後志)》를, 1460년에《탕유관동록후지》를 썼으며, 1463년에는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 이 해에 책을 사러 서울에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의 일을 맡았으며, 1465년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독서를 시작하고,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원각사(圓覺寺) 낙성식에 참석했다. 1468년 금오산에서《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고, 1476년에《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지었다. 1481년 47세에 환속(還俗) 1485년《독산원기(禿山院記)》를 썼다. 절개를 지키면서 불교·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1782년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제향(祭享)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내용]
이산해(李山海 1538~1609)가 초간본 서문(序文)를 찬(撰)하였으며, 1927년에 중간(重刊) 되었다. 중간본 발문은 후손 주사(主事) 김봉기(金鳳起)가 지었다. 시(詩), 만사(輓詞), 잡시(雜詩), 유관서록(遊關西錄), 유관동록(遊關東錄), 유호남록(遊湖南錄), 유금오록(遊金鰲錄), 관동일록(關東日錄), 명주일록(溟州日錄)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6책에는 기문(記文), 사적기(事蹟記), 비명(碑銘) 등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현재 소장본은 5책이 누락되어 있다.
1403 매월당집(梅月當集)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문화예술(文化藝術) 문헌(文獻) 문집류(文集類) 문집류(文集類)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유물번호 003631 / 000
상세설명 [정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 문집(文集).
[인물]
매월당은 조선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췌세옹(贅世翁), 본관은 강릉(江陵), 시중(侍中) 태현(台鉉)의 후손이다. 3세에 이미 시(試)에 능했고, 5세엔 《중용(中庸)》·《대학(大學)》에 통하여 신동(神童)으로 이름났다. 5세에서 13세까지 김반(金泮)의 문하에서《공자》·《맹자》·시경(詩經)》·《서경(書經)》·《춘추(春秋)》를, 윤상(尹祥)에게서 《예서(禮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웠다. 1455년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1458년《탕유관서록후지(宕遊關西錄後志)》를, 1460년에《탕유관동록후지》를 썼으며, 1463년에는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 이 해에 책을 사러 서울에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의 일을 맡았으며, 1465년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독서를 시작하고,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원각사(圓覺寺) 낙성식에 참석했다. 1468년 금오산에서《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고, 1476년에《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지었다. 1481년 47세에 환속(還俗) 1485년《독산원기(禿山院記)》를 썼다. 절개를 지키면서 불교·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1782년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제향(祭享)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내용]
이산해(李山海 1538~1609)가 초간본 서문(序文)를 찬(撰)하였으며, 1927년에 중간(重刊) 되었다. 중간본 발문은 후손 주사(主事) 김봉기(金鳳起)가 지었다. 시(詩), 만사(輓詞), 잡시(雜詩), 유관서록(遊關西錄), 유관동록(遊關東錄), 유호남록(遊湖南錄), 유금오록(遊金鰲錄), 관동일록(關東日錄), 명주일록(溟州日錄)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6책에는 기문(記文), 사적기(事蹟記), 비명(碑銘) 등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현재 소장본은 5책이 누락되어 있다.
1402 매월당집(梅月當集)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문화예술(文化藝術) 문헌(文獻) 문집류(文集類) 문집류(文集類)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유물번호 003630 / 000
상세설명 [정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 문집(文集).
[인물]
매월당은 조선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췌세옹(贅世翁), 본관은 강릉(江陵), 시중(侍中) 태현(台鉉)의 후손이다. 3세에 이미 시(試)에 능했고, 5세엔 《중용(中庸)》·《대학(大學)》에 통하여 신동(神童)으로 이름났다. 5세에서 13세까지 김반(金泮)의 문하에서《공자》·《맹자》·시경(詩經)》·《서경(書經)》·《춘추(春秋)》를, 윤상(尹祥)에게서 《예서(禮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웠다. 1455년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1458년《탕유관서록후지(宕遊關西錄後志)》를, 1460년에《탕유관동록후지》를 썼으며, 1463년에는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 이 해에 책을 사러 서울에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의 일을 맡았으며, 1465년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독서를 시작하고,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원각사(圓覺寺) 낙성식에 참석했다. 1468년 금오산에서《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고, 1476년에《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지었다. 1481년 47세에 환속(還俗) 1485년《독산원기(禿山院記)》를 썼다. 절개를 지키면서 불교·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1782년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제향(祭享)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내용]
이산해(李山海 1538~1609)가 초간본 서문(序文)를 찬(撰)하였으며, 1927년에 중간(重刊) 되었다. 중간본 발문은 후손 주사(主事) 김봉기(金鳳起)가 지었다. 시(詩), 만사(輓詞), 잡시(雜詩), 유관서록(遊關西錄), 유관동록(遊關東錄), 유호남록(遊湖南錄), 유금오록(遊金鰲錄), 관동일록(關東日錄), 명주일록(溟州日錄)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6책에는 기문(記文), 사적기(事蹟記), 비명(碑銘) 등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현재 소장본은 5책이 누락되어 있다.
1401 수저통(匙箸桶) 한국(韓國)
초제(草製)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수저통(수저통)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3629 / 000
상세설명 [정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담아 두는 통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짚으로 먼저 바닥을 엮은 후 원통형의 몸통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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