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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이미지 유물명 국적/시대 재질 상세보기
1400 엿틀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식(食) 가공(加工) 가공(加工) 엿모판(엿모판)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3601 / 000
상세설명 [정의]
엿밥과 엿기름을 섞어 삭힌 것을 자루에 담아 엿물을 짜내는 틀.
1399 흑립 한국(韓國)
피모(皮毛)
말총(말총)

용도기능 의(衣) 관모(冠帽) 입(笠) 흑립(黑笠)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3569 / 000
상세설명 [정의]
조선시대 성인 남자가 머리에 쓰던 관모(冠帽). 머리를 덮는 부분인 모자(帽子)와 얼굴을 가리는 차양부분인 양태(凉太)로 이루어진다.
[개념]
원래 햇볕이나 비와 바람을 가리기 위한 실용적인 용구로서의 쓰개였으나, 재료·형태·제작법이 다양하게 발전하면서 사회성을 가지는 관모로 되었다. 우리 나라의 갓은 형태상으로 볼 때 모자와 양태의 구별이 어려운 방갓형[方笠型]과 구별이 뚜렷한 패랭이형[平凉子型]의 두 계열이 있다. 방갓형의 갓으로는 삿갓[蘆笠]·방갓[方笠]·전모(氈帽) 등이 있다. 패랭이형으로는 패랭이·초립(草笠)·흑립(黑笠)·전립(戰笠)·주립(朱笠)·백립(白笠) 등이 있다. 넓은 의미의 갓이라고 하면 방갓형과 패랭이형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것을 말하나, 일반적으로는 좁은 의미의 갓, 즉 흑립을 말한다.
[역사]
갓의 역사는 멀리 고대에 소급되며, 그 시초형(始初形)은 경주 금령총(金鈴塚)에서 출토된 입형백화피모(笠形白樺皮帽)와 고구려 고분인 감신총(龕神塚) 벽화에 나오는 모자와 양태의 구별이 뚜렷한 패랭이형의 갓을 쓴 수렵인물에서 볼 수 있다. 문헌상으로는 ≪삼국유사≫에 신라 원성왕이 꿈에 복두(邏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갓은 삼국시대에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관리들의 관모로 제정됨으로써 신분이나 관직을 나타내는 사회적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1357년(공민왕 6)에 문무백관에게 갓을 쓰도록 한 것인데, 이어 1367년 7월에는 아문(衙門)의 정3품 이하 관원들에게 각기 품수에 따라 백옥·청옥·수정 등으로 장식된 흑립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1374년 4월에는 재상(宰相)·중방(重房)·각문(閣門)이 모두 갓을 착용하도록 하였는데, 그때의 갓은 재료나 제작기술상 조선시대의 흑립과는 다르나 형태는 패랭이형일 것이다. 갓은 고려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패랭이·초립의 단계를 거쳐 흑립으로 발전되었다. 태종 때 한때 백관들이 갓을 쓰고 궁궐에 출입한 적이 있었으나, "조로(朝路)에 우설일(雨雪日)이 아닌데도 대소관리(大小官吏)가 착립(着笠)하고 있어 미편(未便)하다."고 하여, 이듬해부터 조정에서는 사모(紗帽)를 쓰게 되고 갓은 편복(便服)에 착용하게 되었다. 다양했던 관모 중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갓은 특히 양반층에서 즐겨 썼다.  1894년 단발령의 시행으로 중절모자가 등장하지만 갓은 계속 착용되었다. 1895년에는 천인층(賤人層)에게도 갓을 쓰도록 허락하고 패랭이 쓰는 것을 금함으로써, 의관제도에 귀천의 차별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화되었다. 조선의 갓 문화는 계속 이어져 민족항일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의관 갖추기를 잃지 않았고, 지금도 두루마기에 갓을 쓴 모습을 볼 수 있다.
[종류]
한자로 '흑립(黑笠)' 또는 '입자(笠子)'로 표기되기도 하는 갓은 성인남자용으로 그 형태는 위보다 아래가 조금 넓은 원통형의 모옥(帽屋), 즉 모자집과 아래가 약간 우긋하게 곡선을 이루고 있는 양태, 즉 차양부분으로 이루어지며, 갓을 머리에 고정시키기 위한 갓끈[笠纓]이 있다. 갓은 싸기(갓싸개)의 종류에 따라 진사립(眞絲笠)·음양사립(陰陽絲笠)·음양립(陰陽笠)·포립 (布笠)·마미립(馬尾笠) 등으로 나뉘고, 신분에 따라 달리 착용되었다.  진사립은 머리카락보다 더 가늘게 다듬은 죽사(竹絲)로 갓모자와 양태를 네겹으로 엮고, 그 위에 중국산 촉사를 한
1398 강릉최씨파보(江陵崔氏派譜)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사회제도(社會制度) 족보/호적(族譜/戶籍) 족보(族譜)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유물번호 003550 / 000
상세설명 [정의]
강릉지방 토성중에 하나인 강릉최씨 평장공파의 족보이다.
[내용]
최흠봉(崔欣奉)이 원시조이며, 강릉낙향 시조는 고려조에 진사에 입격한 광정대부문하평리상호군평장사(匡靖大夫門下平里上護軍平章事)를 지낸 최입지(崔立之)이다. 이 족보는 목판본으로 1853년 동해 삼화사(三和寺) 대승암(大乘菴)에서 천·지(天·地) 2책 4권으로 간행되었다. 정미보(丁未譜), 병인보(丙寅譜), 기유보발(己酉譜跋) 등이 서두에 수록되어 있으며, 개국공신녹권(開國功臣錄券)을 비롯한 구전 자료를 함께 수록하였다. 서문은 후손 익호(翼昊)가 썼다.
1397 강릉최씨족보(江陵崔氏族譜)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사회제도(社會制度) 족보/호적(族譜/戶籍) 족보(族譜)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유물번호 003549 / 000
상세설명 [정의]
강릉지방 토성중에 하나인 강릉최씨 평장공파의 족보이다.
[내용]
필사본이며 최흠봉(崔欣奉)이 원시조이며, 강릉낙향 시조는 고려조에 진사에 입격한 광정대부문하평리상호군평장사(匡靖大夫門下平理上護軍平章事)를 지낸 최입지(崔立之)이다. 이 족보는 필사본으로 정조 13년(1789)인 건륭(乾隆) 54년 기유년에 쓰여지기 시작하여 동왕(同王) 23년(1799)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문은 최윤길(崔?吉)이 썼다. 강릉최씨족보원류(江陵崔氏族譜源流)에는 동일한 본관을 사용하고 있는 강릉최씨들의 연원을 기술하면서 평장파의 원류는 고려말 평장사를 지냈던 최입지(崔立之)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혀놓았다. 범례에는 상·중·하 3책으로 간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소장하고 있는 것은 건·곤(乾·坤) 2책이다.
1396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문화예술(文化藝術) 문헌(文獻) 문학(文學) 소설(小說)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유물번호 003540 / 000
상세설명 [정의]
중국 명나라 홍무년간(1368~1398)에 구우(瞿佑)가 지은 괴기소설집으로 1378년경에 완성되었다.
[인물 및 내용]
구우는 중국 명(明)나라때의 문학자로 자는 종길(宗吉), 호는 존재(存齋), 절강성[浙江省] 첸탕[錢塘] 사람이다. 일찌기 양유정(楊維楨)에게서 시재(詩才)를 인정받았으나, 관리로서는 불우하였다. 지방 현(縣)의 훈도(訓導)를 역임하다가 주왕부(周王府) 우장사(右長史)가 되었으나 영락년간(永樂年間, 1403~1424)에 필화(筆禍)로 싼시성[陜西省] 빠오안[保安]에 유배되었으며, 홍희 1년(1425)에 복귀하였다. 송원간(宋元間)에 이렇다 할 작품이 없던 문어소설(文語小說) 분야에서《전등신화(剪燈新話)》를 지어, 많은 모방작을 낳을 정도로 유행하였다. 장수를 누리고,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시에도 아름다운 작품이 있었으나, 지금은《귀전시화(歸田詩話)》 이외는 거의 남은 것이 없다.《전등신화》는 원래 40권이었고 원명은《전등록(剪燈錄)》이었다. 구우가 필화로 빠오안으로 귀양갔을 때 그의 저술의 대부분이 없어지고《전등록》도 없어졌는데 뒤에 포강현윤(蒲江縣尹) 호자앙(胡子昻)이 그의 부하로부터 잔존한 4권을 압수하여 1421년 원저자 구우에게 교정을 받아 편집해서《전등신화》라 개제하였다. 이것은 4권과 부록으로 되어 있는데, 각 권마다 5편의 소설이 있고 부록도 1편의 소설로 되어 전부 21편이 실려 있다. 당나라 전기소설(傳奇小說)의 흐름을 이어받아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이야기가 많고 문체도 그와 어울리게 화려하다. 이 책은 명나라 말기의 통속 소설집《삼언(三言)》《이박(二拍)》이나 명대의 희곡에 소재를 제공했고, 또 청나라 초기의《요재지이(聊齋志異)》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도 조선시대 초기에 들어왔는데, 김시습(金時習)의《금오신화(金鰲新話)》는 이를 모방하여 지었으며, 우리나라를 통하여 일본까지 건너가 일본 고베문학(江戶文學)에도 영향을 미친 바 크다. 이 책은 창주(滄洲) 윤춘년(尹春年)이 정립(訂立)하고 수호자(垂胡子) 임파(林芭)가 집석(集釋)하였던 것을 저본으로 필사한 것이다. 순조 31년(1831) 죽재(竹齋)가 필사하였으며, 상권만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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