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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이미지 유물명 국적/시대 재질 상세보기
1390 연꽃문수막새(蓮花文圓瓦當)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지붕재(지붕재) 수막새(수막새)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3292 / 000
상세설명 [정의]
가옥의 지붕을 덮는 옥개용(屋蓋用)의 건축부재를 말한다.
[발달과정/역사]
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모골(模骨) 및 와범(瓦範) 등의 제작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서 제작한다. 한국에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한국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조적에 맞게 구조가 변형되어, 이른바 한국적인 양식으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3세기말 이후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 건물자리에서 비로소 와당이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는 각 국의 특징이 있는 와당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궐 및 사찰의 건축 조영을 담당하는 관서(官暑)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나라에서 쓰는 기와만을 전담하는 와박사(瓦博士)의 직제(職制)가 있었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었다. 신라에는 특별히 와당만을 제조하는 와기전(瓦器典)이란 마을이 있었으며,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이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기와 지붕은 기본적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그리고 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수막새는 수키와로 인해 형성된 기왓등의 끝에 막새부(드림새)를 접합시킨 기와이다. 막새부는 반원형·타원형인 것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원형인 것이 대부분이며, 그 문양 역시 각종 당초·보상화·동물·귀면 등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연꽃 문양이다. 연꽃 문양의 막새는 중앙에 연자(蓮子)를 담고 있는 원형의 씨방(子房)을 중심으로 주변에 연꽃잎의 문양대를 돌렸다. 연꽃잎은 잎의 배치 양상에 따라 단판·복판·중판으로 구분된다. 씨방과 연꽃잎 사이에 수술을 표현하기도 하며, 각각의 꽃잎 중심부에 꽃모양의 자엽(子葉)을 넣기도 하고, 연꽃잎과 더불어 보상화나 당초문을 함께 표현하여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한다. 원의 가장자리는 테두리로서 주연(周緣)이라고 부른다. 통일신라 이후부터는 주연에 구슬을 일정한 간격으로 연이어 배치해 놓은 무늬(連珠文)를 장식하기도 한다. 이 수막새는 강릉 구정면 학산리에서 출토된 연꽃문수막새(蓮花文圓瓦當)이다. 연씨(蓮子)가 담기지 않은 씨방(子房)을 중심으로 주변에 연꽃술과 8엽(葉)의 연꽃잎(蓮瓣)이 2선으로 새겨져 있다. 각 연꽃잎 사이로 삼각형 모양의 사이잎(間葉)이 돋아나 있다.
1389 연꽃문수막새(蓮花文圓瓦當)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지붕재(지붕재) 수막새(수막새)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3290 / 000
상세설명 [정의]
가옥의 지붕을 덮는 옥개용(屋蓋用)의 건축부재를 말한다.
[발달과정/역사]
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모골(模骨) 및 와범(瓦範) 등의 제작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서 제작한다. 한국에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한국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조적에 맞게 구조가 변형되어, 이른바 한국적인 양식으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3세기말 이후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 건물자리에서 비로소 와당이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는 각 국의 특징이 있는 와당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궐 및 사찰의 건축 조영을 담당하는 관서(官暑)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나라에서 쓰는 기와만을 전담하는 와박사(瓦博士)의 직제(職制)가 있었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었다. 신라에는 특별히 와당만을 제조하는 와기전(瓦器典)이란 마을이 있었으며,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이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기와 지붕은 기본적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그리고 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수막새는 수키와로 인해 형성된 기왓등의 끝에 막새부(드림새)를 접합시킨 기와이다. 막새부는 반원형·타원형인 것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원형인 것이 대부분이며, 그 문양 역시 각종 당초·보상화·동물·귀면 등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연꽃 문양이다. 연꽃 문양의 막새는 중앙에 연자(蓮子)를 담고 있는 원형의 씨방(子房)을 중심으로 주변에 연꽃잎의 문양대를 돌렸다. 연꽃잎은 잎의 배치 양상에 따라 단판·복판·중판으로 구분된다. 씨방과 연꽃잎 사이에 수술을 표현하기도 하며, 각각의 꽃잎 중심부에 꽃모양의 자엽(子葉)을 넣기도 하고, 연꽃잎과 더불어 보상화나 당초문을 함께 표현하여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한다. 원의 가장자리는 테두리로서 주연(周緣)이라고 부른다. 통일신라 이후부터는 주연에 구슬을 일정한 간격으로 연이어 배치해 놓은 무늬(連珠文)를 장식하기도 한다. 이 수막새는 강릉 구정면 학산리 굴산사지에서 출토된 연꽃문수막새(蓮花文圓瓦當)이다.
1388 귀목문수막새(鬼目文圓瓦當)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지붕재(지붕재) 수막새(수막새)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3289 / 000
상세설명 [정의]
가옥의 지붕을 덮는 옥개용(屋蓋用)의 건축부재를 말한다.
[발달과정/역사]
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모골(模骨) 및 와범(瓦範) 등의 제작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서 제작한다. 한국에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한국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조적에 맞게 구조가 변형되어, 이른바 한국적인 양식으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3세기말 이후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 건물자리에서 비로소 와당이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는 각 국의 특징이 있는 와당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궐 및 사찰의 건축 조영을 담당하는 관서(官暑)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나라에서 쓰는 기와만을 전담하는 와박사(瓦博士)의 직제(職制)가 있었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었다. 신라에는 특별히 와당만을 제조하는 와기전(瓦器典)이란 마을이 있었으며,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이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기와 지붕은 기본적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그리고 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수막새는 수키와로 인해 형성된 기왓등의 끝에 막새부(드림새)를 접합시킨 기와이다. 막새부는 반원형·타원형인 것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원형인 것이 대부분이며, 그 문양 역시 각종 당초·보상화·동물·귀면 등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연꽃 문양이다. 연꽃 문양의 막새는 중앙에 연자(蓮子)를 담고 있는 원형의 씨방(子房)을 중심으로 주변에 연꽃잎의 문양대를 돌렸다. 연꽃잎은 잎의 배치 양상에 따라 단판·복판·중판으로 구분된다. 씨방과 연꽃잎 사이에 수술을 표현하기도 하며, 각각의 꽃잎 중심부에 꽃모양의 자엽(子葉)을 넣기도 하고, 연꽃잎과 더불어 보상화나 당초문을 함께 표현하여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한다. 원의 가장자리는 테두리로서 주연(周緣)이라고 부른다. 통일신라 이후부터는 주연에 구슬을 일정한 간격으로 연이어 배치해 놓은 무늬(連珠文)를 장식하기도 한다. 이 수막새는 강릉 구정면 학산리 굴산사지에서 출토된 귀목문수막새(鬼目文圓瓦當)이다. 중앙에는 씨방(子房)과 연꽃잎(蓮瓣) 대신 귀목문(鬼目文)을 문양화하였다. 주연(周緣)에는 구슬무늬(蓮珠文)이 둘러져 있다.
 
1387 귀목문수막새(鬼目文圓瓦當)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지붕재(지붕재) 수막새(수막새)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3288 / 000
상세설명 [정의]
가옥의 지붕을 덮는 옥개용(屋蓋用)의 건축부재를 말한다.
[발달과정/역사]
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모골(模骨) 및 와범(瓦範) 등의 제작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서 제작한다. 한국에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한국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조적에 맞게 구조가 변형되어, 이른바 한국적인 양식으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3세기말 이후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 건물자리에서 비로소 와당이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는 각 국의 특징이 있는 와당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궐 및 사찰의 건축 조영을 담당하는 관서(官暑)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나라에서 쓰는 기와만을 전담하는 와박사(瓦博士)의 직제(職制)가 있었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었다. 신라에는 특별히 와당만을 제조하는 와기전(瓦器典)이란 마을이 있었으며,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이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기와 지붕은 기본적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그리고 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수막새는 수키와로 인해 형성된 기왓등의 끝에 막새부(드림새)를 접합시킨 기와이다. 막새부는 반원형·타원형인 것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원형인 것이 대부분이며, 그 문양 역시 각종 당초·보상화·동물·귀면 등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연꽃 문양이다. 연꽃 문양의 막새는 중앙에 연자(蓮子)를 담고 있는 원형의 씨방(子房)을 중심으로 주변에 연꽃잎의 문양대를 돌렸다. 연꽃잎은 잎의 배치 양상에 따라 단판·복판·중판으로 구분된다. 씨방과 연꽃잎 사이에 수술을 표현하기도 하며, 각각의 꽃잎 중심부에 꽃모양의 자엽(子葉)을 넣기도 하고, 연꽃잎과 더불어 보상화나 당초문을 함께 표현하여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한다. 원의 가장자리는 테두리로서 주연(周緣)이라고 부른다. 통일신라 이후부터는 주연에 구슬을 일정한 간격으로 연이어 배치해 놓은 무늬(連珠文)를 장식하기도 한다. 이 수막새는 강릉 구정면 학산리 굴산사지에서 출토된 귀목문수막새(鬼目文圓瓦當)이다. 중앙에는 씨방(子房)과 연꽃잎(蓮瓣) 대신 귀목문(鬼目文)을 문양화하였다. 주연(周緣)에는 구슬무늬(蓮珠文)이 둘러져 있다.
 
1386 유기숟가락(匙) 한국(韓國)
금속(金屬)
복합금속(復合金屬)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시(匙)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3286 / 000
상세설명 [정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아울러 이르는 말, 또는 상대방을 높이어 그의 숟가락을 이르는 말.
[발달과정/역사]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숟가락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나진초도패총에서 출토된 골제품(骨製品)이다. 중국에서는 서기전 10∼6세기경의 가요를 모은 ≪시경≫에 처음 기록이 나온다. 일본에서는 서기전 3세기경의 유적지에서 출토되었다. 젓가락은 우리 나라에서는 공주무녕왕릉에서 출토되었다.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서기전 403∼221년)에 비로소 기록이 나온다. 그러므로 젓가락은 숟가락에 비하여 늦게 발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 나라에서 수저를 병용한 것은 삼국시대였다. 중국·일본에서도 시기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수저를 병용하였다. 그러다가 중국·일본에서는 점차 숟가락의 이용이 줄어들고 젓가락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병용하는 관습은 우리 나라의 독특한 관습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병용하면서 식사하는 관습이 전통을 이루게 된 것은 우리 일상식의 내용이 국물음식과 국물이 없는 음식을 항상 병용하게끔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수저는 상고시대에는 주로 청동제품이었다. 이어서 놋쇠제품·백통제품·은제품으로 변천되었다. 형태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 고려 초기의 것은 숟가락의 자루가 크게 휘어졌다. 중기의 것은 자루 끝이 제비꼬리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들어서면서 숟가락자루의 제비꼬리가 없어지고 자루의 휨이 적어진다. 숟가락 면은 나뭇잎과 같은 타원형을 이룬다.
수저는 고려 중기 이후에는 숟가락자루가 길어지고 두꺼워지며 곧아진다. 숟가락 면은 둥글어진다. 젓가락은 한쪽이 점차 가늘어져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이루게 된다. 수저의 윗부분에는 장식으로 길한 의미의 글자나 꽃을 칠보로 입히는 경우가 많다.
수저의 사용은 숟가락이 주가 된다. 국물뿐만 아니라 밥도 숟가락으로 먹는 것이 정식이다. 숟가락을 손에 쥐면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밥상에 놓지 말아야 한다. 젓가락을 쓸 때에는 숟가락을 밥그릇이나 국그릇에 걸쳐둔다. 젓가락을 쓰지 않을 때는 밥상에 눕혀두어도 좋다. 젓가락의 용도는 반찬을 집는 데에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어린이의 첫돌날에 아기의 개인용 수저를 준비하여 주는 풍습이 있다. 성장하면 연령에 맞추어 큰 것으로 바꾸어 주고 혼인할 때에 신부가 신랑·신부 두 사람의 수저를 밥그릇·대접과 함께 준비하여 거의 평생을 쓴다. 따라서 각기 개인용 수저가 있으며 접객용 수저는 따로 준비한다. 이와 같이 수저는 우리 식문화의 저변적 특성을 형성하는 한 요소이며,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는 깊은 뜻의 식사용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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