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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이미지 유물명 국적/시대 재질 상세보기
1360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문화예술(文化藝術) 문헌(文獻) 문학(文學) 소설(小說)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유물번호 003063 / 000
상세설명 [정의]
조선 후기에 김만중(金萬重)이 지은 고전소설.
[인물]
김만중은 조선조 문신·학자로 자는 중숙(重叔),호는 서포(西浦), 본관은 광산(光山). 생원(生員) 익겸(益兼)의 유복자(遺腹子)이다. 현종 6년(166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1671년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귀양갈 때 외에는 노모 곁을 떠난 일이 없었고《구운몽(九雲夢)》도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 때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698년 관직이 복구되었고, 1706년 효행에 대해 정표(旌表)가 내려졌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사씨남정기》는《남정기(南征記)》라고도 하며 확실한 창작 연대는 미상이나, 숙종이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키고 장희빈(張嬉嬪)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하다가 마침내 남해도(南海島)로 유배되었는데, 배소에서도 흐려진 임금의 마음을 참회시키고자 이 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집필시기는 숙종 15년(1689)에 작가가 세상을 뜬 숙종 18년(1692) 사이가 된다.
[줄거리]
중국 명(明)나라 때 유현(劉炫)의 아들 연수(延壽)는 15세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된다. 유한림은 그 후 숙덕(淑德)과 재학(才學)을 겸비한 사씨(謝氏)와 혼인하였으나, 9년이 지나도록 소생이 없자 교씨(喬氏)를 후실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간악하고 시기심이 많은 교씨는 간계로써 사씨부인을 모함하여 그녀를 폐출시키고 자기가 정실이 된다. 그 후 교씨는 간부(姦夫)와 밀통하며 남편인 유한림을 조정에 모함하여 유배 보내게 한 다음 재산을 가지고 간부와 도망치다가 도둑을 만나 재물을 빼앗기고 궁지에 빠진다. 한편 유한림은 혐의가 풀려 배소에서 풀려나서 방황하는 사씨를 찾아 다시 맞아들이고 교씨와 간부를 잡아 처형한다는 이야기이다. 즉 작중 인물 중의 사씨부인은 인현왕후를, 유한림은 숙종을, 요첩(妖妾) 교씨는 장희빈을 각각 대비시킨 것으로, 궁녀가 이 작품을 숙종에게 읽도록 하여 회오시키고 인현왕후를 복위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본(寫本) 외에 후손인 김춘택(金春澤)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있으며, 1914년 영풍서관(永豊書館)판과 1917년 박문서관(博文書館)판의 활자본이 있고, 1955년에 김민수(金敏洙)가 교주(敎註)를 달아《현대문학(現代文學)》에 소개한 바 있다. 이 책은 필사본으로 선장(線裝)이며, 1면 8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필사시기와 필사자는 미상이다.
1359 4인용 대패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산업/생업(産業/生業) 공업(工業) 목공(木工) 대패(대패)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3052 / 000
상세설명 [정의]
목재면을 매끈하게 하거나 표면을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깎아내는 연장.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훈몽자회≫에는 '포(揚)' 또는 '倨溜[椎揚]'로, ≪재물보(才物譜)≫에는 '倨溜[揚, 推揚]'·'倨溜집[揚匡]'·'倨溜밥[揚花]'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패가 우리 나라의 목공 연장으로 등장하는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본래 목재의 면을 매끈하게 다듬는 작업은 원목을 도끼나 자귀로 다듬는 경우와 톱으로 켰을 경우에 따라 그 사용 연장이 달라진다. 도끼나 자귀로 원목을 다듬게 되면 목재의 표면이 파상(波狀)을 이루는데, 이를 매끈하게 다듬는 데에는 손잡이가 긴 다듬는 칼이나 훑이·깎낫 등이 적당하며 대패는 부적합하다. 반대로, 켤톱과 같은 큰 톱으로 켜낸 목재의 표면을 매끄럽게 하는 데는 대패가 적당하다. 따라서, 대패의 등장시기는 켤톱 또는 그밖의 목재를 세로로 절단하는 연장의 출현시기와 관련이 깊다. 이렇게 볼 때 대패의 출현은 늦어도 고려말이나 조선 초기로 볼 수 있으며, 그보다 훨씬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왜냐하면, 켤톱은 이미 15세기 이전에 '조선톱'이라는 호칭으로 일본에 보급되었으므로, 그보다 훨씬 이전에 우리 나라에서 켤톱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고 볼 수 있고, 켤톱과 함께 대패도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기본형태는 나무로 만든 육면체인 장방형 대팻집에 깎인 대팻밥이 위로 올라오도록 대패아가리를 파내어 여기에 엇비슷하게 대팻날을 끼운다. 대팻날 뒤쪽에 대팻손을 대팻집에 직각 방향으로 가로질러 끼워서 이것을 잡고 앞으로 밀 수 있도록 한다. 날 앞쪽 대팻등에는 끌손잡이를 박아 당길 수 있게 한다. 끌손은 두 사람이 대패질할 때 앞에서 한 사람이 손으로 당기거나 끈을 매어 당기는 것이다. 대패는 마름질 시기에 따라 막대패(호련대패)·재대패(중대패)·잔대패(마무리대패)로 나누며, 모양과 기능에 따라 평대패·장대패·짧은대패·곧날대패·실대패·개탕(開坐)·변탕(邊坐)·뒤접대패·둥근대패·배꼽대패·돌림대패·배밀이대패·골밀이대패·살밀이대패 등으로 구분한다. 평대패는 목재 표면을 평평하게 밀어 깎는 대패로서 대패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다. 대패바닥과 대팻날이 직선으로 평평하게 되어 있다. 장대패는 대팻집을 길게 하여, 막대패로 밀었을 때 생기는 굴곡을 고르는 데 사용된다. 대팻집이 아주 길 때는 끌손잡이를 달아 두 사람이 작업을 하기도 한다.  막대패는 목재 표면을 초벌로 대강 다듬는 것으로, 대팻밥이 잘 빠져나가도록 아가리가 크게 만들어졌다. 곧날대패는 대패바닥을 평활하게 고르기 위하여 날을 대패바닥에 직각되게 끼워 사용하는 것이다. 실대패는 장지나 판자 등을 끼우기 위하여 목재면을 실처럼 가늘게 홈을 파내는 대패이다. 뒤접대패는 표면이 오목하게 들어간 곳이나 굽은 곳의 안쪽을 깎아내기 위한 것이며, 둥근대패는 목재면을 둥근 막대처럼 깎거나 둥근 홈을 파내는 데 사용된다. 개탕이란 장지나 판자 같은 것을 끼우기 위하여 홈을 팔 때 사용하는 대패인데, 모양은 대패바닥 가운데를 필요한 넓이만큼 튀어나오게 하고 좌우 양쪽은 턱지게 한다. 변탕은 모서리를 턱지게 깎기 위하여 대패바닥을 턱지게 만든 것이다. 살밀이대패는 문살의 표면을 장식하기 위하여 대팻날에 여러 모양의 굴곡을 준 것이다. 대패의 사용에 따라 조선시대의 목조건축은 표면의 마무
1358 곰방메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산업/생업(産業/生業) 농업(農業) 파종경작(播種耕作) 곰방메(곰방메)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3030 / 000
상세설명 [정의]
흙덩이를 깨뜨리거나 골을 다듬으며, 씨뿌린 뒤 흙을 고르는 데 쓰는 연장.
[일반적 형태 및 특징]
1429년(세종 11)에 편찬한 ≪농사직설(農事直說)≫에는 '유목(老木)'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통곰배(충청북도 봉양)·뭉퉁곰배(경상남도 영산)·곰뱅이(전라남도 보성·고흥)·곰배(경상도)' 등으로 불린다. 지름이 6㎝ 정도이고, 길이가 30㎝ 정도 되는 둥근 나무토막에다 긴 자루를 박은 T자형이다. 논밭을 쟁기로 갈면 곰방메로 흙덩이를 깨뜨려서 덩어리진 흙이 없도록 한다. 또, 씨앗을 뿌리기 위하여 쟁기로 골을 타면 이것으로 골을 편평하게 고른다. 씨를 뿌린 뒤 흙덩이를 깨어 고르면서 씨앗을 덮는 데도 사용한다. 이 곰방메에 서너개의 구멍을 뚫어 나무를 깎아서 박아 갈퀴처럼 만들어 쓰기도 하는데, 이를 '발곰방메(전라남도 고흥)'라고 한다. 곰방메로 흙을 깨는 작업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데, 그것을 곰방메질·뎅이치기·뎅이깨기·곰배질이라고 한다.
1357 백자청화화문연적(白磁靑畵花文硯滴)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주(住) 생활용품(生活用品) 문방구(文房具) 연적(硯滴)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2923 / 000
상세설명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백자청화(靑畵)는 유약을 입히기 전의 그릇 표면에 코발트계의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순백자와 마찬가지로 잡물의 함유가 전혀 없는 순도 높은 장석계 유약을 그 위에 씌워서 번조한 것이다. 코발트계의 안료는 페르시아 일대에서 일찍이 개발하여 사용한 것으로 아라비아 상인의 손을 거쳐 중국을 통해 수입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불렀으며 대단히 귀하게 여겼다. 이 백자연적은 원형(圓形)을 이룬 연적으로 상면 중앙에 물구멍이 나있고 측면에 주구(注口)가 부착되어 있다. 상면은 편평한 형태이고, 측면은 곧게 내려오다가 굽에 가까워지면서 내경한다. 상면에만 청화안료(靑華顔料)를 사용하여 화문(花文)을 시문하였다.
1356 그릇궤(器櫃)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주(住) 생활용품(生活用品) 가구(家具) 궤(궤)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921 / 000
상세설명 [정의]
물건을 넣기 두는 장방형의 상자. 크기에 따라 분류하여 큰 것은 궤, 작은 것은 갑(匣), 아주 작은 것은 독(窺)이라 한다. 또, 세부구조의 특징에 따라 궤나 함(函)으로 나누기도 한다.
[개설]
말은 곡물의 분량을 측정하는 도구로, 그 부피는 한 되의 정확한 10배가 되게 정해진 십진법 단위량일다.
[역사]
≪삼국유사≫에 탈해왕이 길이 20척, 너비 13척의 궤에서 나왔고,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도 금궤에서 나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궤는 오래 전부터 사용된 가구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형태는 윗면 또는 앞면의 반을 외짝문으로 만들어 여닫도록 하고 빗장과 자물쇠를 달았으며, 재료는 주로 결이 곱고 단단한 나무를 썼는데 황유목(黃楡木 : 느릅나무)을 가장 상품으로 여겼다. 용도는 책·활자·문서·돈·옷감·의복·제기·화자기(怜磁器)·놋그릇·곡물 등을 보관하는 데 사용하였고, 특수한 용도로서 종묘(宗廟)에서는 신주를 보관하는 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궤의 용도가 다양하므로, 사용계층도 궁중을 비롯한 관청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었다. 궤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며, 각 지방에 따라 독특한 발전을 보였다. 대표적인 궤로는 각종 물품을 보관하는 반닫이, 엽전을 보관하는 돈궤, 곡물을 담아두는 뒤주가 있다. 큰 궤는 대부분 두께 2㎝ 이상의 통판을 사괘맞춤으로 짰으며, 작은 궤는 연귀짜임(귀끝을 모지게 엇벤 짜임)이나 맞짜임·장부짜임(한쪽을 가늘게 만들어 다른 재목 구멍에 넣는 짜임)으로 짜서 앞면과 측면의 짜맞춘 부위에 감잡이(양쪽으로 걸쳐 박는 쇳조각)를 대어 견고하게 하였다. 외짝문에는 경첩을 달아 여닫거나 두 개의 긴 뻗침막대를 대어 문을 들어낼 수 있도록 하며, 빗장을 잠그면 열 수 없도록 만들었다. 좌우 양측의 들쇠나 자물통 등은 무쇠를 주로 사용하였다. 이 궤는 그릇을 보관하기 위한 함으로 각 모서리는 거멀장식으로 하였는데 장식의 끝 부분을 꽃모양으로 처리하였다. 문판은 각각 3개의 제비추리형 경첩으로 여닫게 되어 있고, 각기 중앙에 꺽쇠형 받침대가 'ㄱ'자 모양으로 내려와 제비추리형 자물쇠 앞바탕의 배목과 결합하도록 되어 있다. 앞면에 화형(花形)바탕에 활형손잡이(弓形擧金)이 각각 1개씩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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