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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이미지 유물명 국적/시대 재질 상세보기
1370 패랭이 한국(韓國)
나무(나무)
대나무(대나무)

용도기능 의(衣) 관모(冠帽) 입(笠) 패랭이(패랭이)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3153 / 000
상세설명 [정의]
천인계급이나 상제(喪制)가 쓰던 갓.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평량자(平凉子)·평량립(平凉笠)·폐양립(蔽陽笠)·차양자(遮陽子)라고도 한다. 가늘게 오린 댓개비로 성기게 얽어 만든 것으로, 모자집과 테의 구분이 분명하며 모정(帽頂)은 둥글다. 갓의 발달과정에서 보면, 모정에서 테까지 민틋하게 내려간 방립(方笠)에서 완성된 형태의 갓, 즉 흑립으로 이행하는 중간단계에 속하는 것이다. 흑립이 조선시대 대표적인 사서인(士庶人)의 관모로 됨에 따라, 패랭이의 용도는 점차 국한되어 사인(士人)은 대상(大喪)이 지나고 담제(詭祭)만 남은 짧은 기간 동안에만 쓰거나, 상인(喪人)이 원행(遠行)할 때 방립 대신 쓰기도 하였다. 역졸·보부상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조선 말기까지 사용하였는데, 역졸은 흑칠(黑漆)한 것을 쓰며, 보부상은 목화송이를 큼직하게 얹어서 썼다. 또한, 천업인은 패랭이를 쓰기는 하되 노상에서 양반을 만나면 그것을 벗고 엎드리는 습속이 있었다. ≪연려실기술≫·≪임하필기(林下筆記)≫·≪야곡삼관기(冶谷三官記)≫에 "임진왜란 때 적이 흑립을 쓴 양반을 만나면 잡아가고, 패랭이를 쓴 자는 극빈자라 하여 잡아가지 않았으므로 이때 양반들도 패랭이를 써서 한때 크게 유행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1895년에 천인층에도 흑립을 쓰도록 하고 패랭이 쓰는 것을 금하였으나, 천인들은 흑립을 감히 쓰지 못하고 계속 패랭이를 썼다.
1369 떡판(案盤)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식(食) 가공(加工) 가공(加工) 안반(안반)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3152 / 000
상세설명 [정의]
흰떡이나 인절미 등을 치는 데 쓰이는 받침. 안반(案盤) 또는 병안(餠案)이라 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안반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가로 1m, 세로 1. 5m, 두께 15∼20㎝ 정도의 나무판을 흔히 쓰며 네 귀에 짧은 다리를 붙인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가로 2m, 세로 50㎝ 정도의 좁고 긴 나무판으로 만드는데, 한쪽은 반반하게 두고 다른 한쪽은 우묵하게 파서 우묵한 곳에 넣고 떡을 친 다음 옆의 반반한 판에서 썰도록 만든다. 떡을 칠 때에는 안반 위에다 찐 떡덩이 또는 밥덩이를 올려놓고 한옆에서 적절하게 물기를 주어가면서 떡치는 사람이 공이로 힘차게 쳐서 매끄러운 떡이 되게 한다. 떡을 치는 공이는 떡메라고 하는데, 둥글고 기름한 나무토막(지름 15㎝, 길이 20㎝ 내외) 가운데에 긴 자루를 붙인 것, 양옆의 작은 손잡이에 끈을 매고 이를 들었다가 내리치도록 만든 것 등이 있다. 안반은 느티나무로 만든 것이 가장 좋으며, 떡메는 황양목(黃楊木)으로 깎은 것을 손꼽는다. 조선시대의 가정에는 안반과 떡메가 상비되어 있었다. 이 안반은 통나무 가운데를 우묵하게 파내어 떡밥을 넣고 떡메로 치게 되어 있는 형태이다.
1368 따비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산업/생업(産業/生業) 농업(農業) 파종경작(播種耕作) 따비(따비)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3149 / 000
상세설명 [정의]
논이나 밭을 가는 원시적인 형태의 농기구.
[개설]
농경문화 발생 이전의 수렵채집민이 사용하던 굴봉(掘棒)에서 발전된 것으로 따비가 발전하여 쟁기나 극젱이가 나타났다. 근래에까지 서해안과 그 도서지방 및 제주도에서 극젱이로 갈고 남은 구석진 땅이나 돌밭을 가는 데 사용되었다. 요즈음에는 솔뿌리나 청미래덩굴 등을 캐기도 하는데 이를 '솔따비'라고 하며, 따비로나 갈 수 있을 만한 좁은 땅을 '따비밭'이라고 한다. 지역에 따라서 따부(경기도 덕적도 등지)·따보(전라남도 영광군)·탑(함경북도) 등으로 불리며, ≪농사직설≫에는 '內(향명:地寶)', ≪산림경제≫에는 '地保', ≪해동농서≫에는 '長遜(女뷔)'로 표기되어 있다. 3, 4세기의 청동기에 따비를 쓰는 모습이 나타나고 철기시대 유적지에는 따비의 날이 명도전과 함께 출토되었으며, 낙랑군의 고분에서 출토된 전(塼)에도 이의 그림이 있어 우리 나라에서 따비 사용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려 준다. 따라서 따비는 이 땅에 농업이 시작된 당시부터 거의 전국적으로 사용되다가 농경술과 농기구의 발전에 따라 내륙지방에서는 100년 전쯤에 자취를 감추고, 발전이 늦어진 일부 해안이나 도서지방에서 요즈음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러 형태의 따비가 사용되는 분포지역은 확연히 나뉘어 서로 공존했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말굽쇠형따비의 경우 인천 앞바다의 덕적군도에서는 1960년대까지도 중요한 연장의 하나로 쓰였던 데 반하여, 연평도나 백령도 등지에는 흔적도 없다. 우리 나라에서 쓰였던 따비는 다섯 종류이다.
[종류 및 형태]
첫째, 말굽쇠형따비(무게:몸체 6.9㎏, 날 800g)는 경기도의 덕적도·풍도·자월도 등지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아래쪽이 앞으로 조금 휘어 나간 몸체 위쪽에 손잡이를 가로대고 몸체 중간의 턱이 진 곳에 발판을 달았다. 그리고 극젱이의 보습처럼 얇게 깎은 몸체 끝에 말굽쇠모양의 쇠날을 끼웠다. 이는 가로 끼운 손잡이를 옆으로 돌려서 흙을 떠엎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둘째, 코끼리이빨모양따비(무게:9㎏)는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해안 및 도서지역과 제주도에서 사용되었다. 1970년 대전에서 발굴되어 관심을 모았던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에 이것을 사용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발판까지의 몸체는 말굽쇠형따비와 비슷하나 손잡이가 없고, 위 끝이 앞으로 길게 휘어서 뻗어 나갔다. 발판 아래쪽에는 코끼리 이빨처럼 끝이 뾰족한 세모꼴의 쇠날 두 개를 박았기 때문에 쌍따비라고도 한다. 휘어진 자루가 길어서 날을 땅에 박고 그 끝을 아래로 잡아 내리면 흙이 떠올려진다. 자갈밭에서 쓰기에 알맞다.  셋째, 주걱형따비(무게:6.8㎏)는 제주도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형태는 말굽쇠형따비와 비슷하나 단지 날의 모양이 다르다. 몸체 끝에 끼운 쇠날은 통으로 부어서 만든 것으로 윗부분은 괭이의 괴통처럼 둥글고 날의 너비는 좁은 편이며, 날 끝이 다른 따비처럼 뾰족하지 않고 주걱처럼 둥그스레한 것이 특징이다. 몸체 중간에는 말굽쇠형따비와 같은 모양의 발판을 달았다. 이는 발판에 발을 올려 놓고 날을 땅에 박은 다음 손잡이를 옆으로 돌려서 흙을 떠올리게 되어 있다. 넷째, 송곳형따비는 제주도에서 주로 쓰였다. 대체로 따비의 전신이라고 할 굴봉을 닮았으며, 따비 중에서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날 끝이 송곳처럼 뾰족하다. 몸체는 곧으며 중앙부의 오른
1367 인근당문생계첩(忍勤堂門生契帖)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사회제도(社會制度) 문서(文書) 기타(其他)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유물번호 003142 / 000
상세설명 [내용]
계남(桂南)은 조선후기 삼척이 낳은 서화예술가로서 독특한 형식의 서법(書法)을 개척한 서예가이자 시인으로서 널리 알려져있다. 조선조 후기의 대표적 서화가이던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에게서 15세에서 20세까지 글씨를 배웠다. 계남은 어려서부터 백부에게서 글을 배웠고 소남 사후에느 소남의 수제자였던 만재(晩齋) 홍락섭(洪樂燮) 문하에서 학문과 글씨를 익혔다. 청주(淸州)의 한학자인 성암(惺菴) 박주순(朴?淳)에게서 한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글씨는 조선중기의 명필이던 이광사(李匡師), 조광진(曺光振)에서 이소남(李少南), 심계남(沈桂南)으로 이어졌으며 조광진과 동시대인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독특한 추사체도 익혔다. 전(篆)·예(隸)·해(楷)·행(行)·초(草)에 걸쳐 그의 독창성은 계남체를 완성하고 그의 스승인 소남(少南)이 시도한 사팔체법(四八體法)도 썼다. 1964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많은 글씨와 글을 남겼다. 이 책은 필사본으로 1905년 계남 심지황이 쓴 서(序), 입령(立令), 좌목(座目) 등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인근당은 계남 심지황의 백부이며, 사부로써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으며, 이에 조카인 심지황을 비롯한 문도들이 중심이 되어 인근당문생계를 구성하였다.
1366 계추재문생계첩(桂秋齋門生契帖)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사회제도(社會制度) 문서(文書) 기타(其他)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유물번호 003141 / 000
상세설명 [내용]
본 서는 동해시 용산서원 아래 동회동에서 계추선생(桂秋先生)이 가숙(家塾)을 차려놓고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선생의 문도들이 선생을 존경하고 또한 그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문생계(門生契)를 조직하고 만든 계첩(契帖)이다. 이 계첩은 융희(隆熙) 2년 문생인 내질(內侄) 최상면(崔相冕)이 만들었으며, 본 소장본은 1962년 새로이 필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록내용은 융사지도(隆師之道), 제자지직(弟子之職) 등을 비롯한 11개 조항의 입령(立令), 김원탁(金源卓)을 비롯한 10명의 명단인 좌목(座目)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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