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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이미지 유물명 국적/시대 재질 상세보기
1350 장군(缶)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장군(장군) 산업/생업(産業/生業) 농업(農業) 파종경작(播種耕作) 장군(장군)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893 / 000
상세설명 [정의]
물·술·간장·오줌 따위를 담는데 쓰는 그릇.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중두리를 뉘어놓은 모양의 것으로 한쪽 마구리는 평평하고 다른 쪽 마구리는 반구형(半球形)이며, 배때기에 좁은 아가리를 붙였다. 오지로 만든 작은 것에는 물이나 술 따위를 넣으나 큰 것에는 오줌을 담아 지게로 운반한다. 이를 오줌장군·오줌추마리(경상남도 영산)·소매장군(전라남도 보성)·장군(전라남도 보성·구례, 강원도 명주) 등으로 부른다. 장군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큰 것은 지름 30㎝, 길이 60㎝ 정도로서 서말의 오줌이 들어가며, 작은 것은 한 말들이도 있다. 강원도의 오줌장군은 한쪽 마구리를 봉긋하게 오그리고 끝에 깃봉모양의 돌기를 붙였다. 이것은 손잡이다. 들어 내리거나 오줌을 쏟기 위하여 한쪽으로 기울일 때 이용한다.
한편, 충청도일대에서는 항아리처럼 배가 부르고 위쪽에 주둥이가 달렸으며 양쪽에 손잡이를 붙인 것을 쓴다. 이것을 지게에 얹어 보리밭으로 나른 다음에 오줌을 새갓통에 따라서 준다. 오줌장군 가운데에는 쪽나무를 모아 통을 걸어서 만든 나무장군이 있다. 가운데가 약간 부르고, 양끝은 조금 작으며, 오지장군처럼 가운데에 주둥이를 달았다. 몸 주위로는 대를 둘러 감아 고정시키고 주둥이는 단단한 나무를 깎아 박는다. 나무장군은 오줌뿐 아니라 거름을 담아 나르기도 한다. 작은 것에는 두 말, 큰 것에는 너 말을 담는다. 나무장군은 오지장군처럼 깨지지 않는 장점이 있어 공사장에서 물을 져 나르는 데에도 썼다. 수원성을 쌓은 내력을 적은 〈화성의궤(華城儀軌)〉에 그림이 실려 있다. 그러나 나무장군은 쓰지 않을 때 나무쪽이 오그라들어서 조각이 나는 일이 많아 다시 결어야 하는 불편이 있다. 유중림(柳重臨)은 ≪증보산림경제≫에 장군을 장분(長盆)으로 적었다.
1349 벼루(硯) 한국(韓國)
석(石)

용도기능 주(住) 생활용품(生活用品) 문방구(文房具) 연(硯)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889 / 000
상세설명 [정의]
먹을 가는 데 사용하는 문방구.
[발달과정/역사]
≪고려도경≫에 따르면 "연왈피로(硯曰皮盧)"라 하여 이미 고려 때부터 벼루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보통 돌로 만들지만 와연(瓦硯)·도연(陶硯)·자연(磁硯)·이연(泥硯)·토제연(土製硯)도 있으며, 보석류나 금석류로도 만든다. 이 가운데서도 충청남도 보령의 남포지방에서 나는 남포석(藍浦石)을 가장 으뜸으로 치는데, 먹을 갈 때 매끄러워 조금도 끈적거리지 말아야 하며, 묵지(墨池 : 묵즙을 모으도록 된 오목한 곳으로 硯池라고도 한다.)에 물을 넣어 두어 10일 이상 되어도 마르지 않는 것을 좋은 벼루로 친다. 현재까지 전해 오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은 중국 한대의 것으로서, 중국 본토와 낙랑무덤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이 중 채협총(彩練塚)에서 출토된 벼루는 장방형의 판연(板硯)으로 칠이 된 연대(硯臺)에 고정시킨 것이고, 평안남도 평원의 석암리9호분(石巖里九號墳)에서 출토된 벼루의 경우 둥근 목대(木臺)에 붙여 세 발로 받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묵지가 없는 평평한 것인데, 먹을 개기 위한 연구(硏具, 磨石)가 딸려 출토된다. 묵지가 있는 벼루가 출현한 것은 남북조시대부터인데, 이때는 원형·방형의 벼루가 가장 많다. 당나라 이후에는 풍자연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문방구 애완의 풍조가 유행하면서 기형도 다양해졌다. 도연은 남북조시대부터 사용되었는데, 원형으로 주변이 낮아지거나 홈이 둘러진 것으로, 원대 아래는 많은 제각(蹄脚)이 받치는 형태로 된다. 당대에는 동작대(銅雀臺)의 옛 기와를 가지고 만든 와연이 유행하며, 도제의 풍자연도 생산되었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도제의 원형벼루가 만들어졌으며, 삼국에서 모두 간소한 제각이 달리고 뚜껑이 있는 백족연(百足硯)이 사용되었고, 이와 함께 석제원형벼루도 전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연지(硯池) 외벽과 발에 조각이 된 벼루도 나타났다. 그런데 대체로 석연이 일반화된 것은 고려시대 이후라고 생각되는데, 현재 발굴되는 고려시대 무덤에서는 부장품으로 석제벼루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형태는 장방형을 주축으로 하여 풍자연·금연 등 다양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크기·형태와 장식의 종류가 더욱 다양해져 석연뿐 아니라 자연(磁硯 : 자기로 만든 벼루)도 생산되었다. 우리 나라의 석연재(石硯材)는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데, 무산·위원·평양·장산곶·정선·평창·장단·단양·계룡산·남포·안동·경주·언양·장수·강진 등이 대표적인 산지로 꼽힌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크기는 서당연(書堂硯)처럼 큰 것에서부터 손가락만한 행연(行硯 : 여행용 벼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형태 또한 원형·4각형·6각형·8각형·12각형·타원형에서부터 여러 가지 물건의 모양을 본뜬 구연(龜硯)·연화연·풍자연(風字硯)·태사연(太史硯)·금연(琴硯)·석고연(石鼓硯)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조각문양은 용·학·거북·봉황·포도·매화·난초·국화·대나무·불로초·감·물고기·팔괘(八卦)·십장생(十長生)·소상팔경(瀟湘八景) 등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문자를 돋을새김하거나 오목새김한 것도 있다.
1348 갓집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의(衣) 관/복함(冠/服函) 관/복함(冠/服函) 갓집(갓집)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883 / 000
상세설명 [정의]
갓을 넣어두는 함.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조선시대에 갓 착용이 일반화되면서 사용하게 된 것으로, 형태상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받침(갓을 올려놓는 부분)과 덮개가 분리되지 않은 형인데, 보통 대오리로 아랫부분은 원통형, 윗부분은 원추형으로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종이를 발라 기름을 먹여서 만든다. 밑변을 이등분하여 여닫게 해서 이 부분으로 갓을 집어넣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위쪽에 끈을 달아서 걸게 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상자처럼 뚜껑을 따로 만들어 덮은 것으로, 나무로 짜거나 종이를 여러 겹 발라서 만든다. 덮개는 갓과 비슷하게 양태 부분과 총대우(모자집)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밑받침은 원·사각·팔각·12각형 등 다양하다. 이 것은 또, 흔히 표면에 여러가지 무늬나 장식을 넣어 아름답게 꾸몄는데, 주로 장농 위에 얹어두고 사용했으므로 방안치레의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이 갓집은 받침과 덮개가 분리되지 않는 형태의 갓집이다.
1347 기름틀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식(食) 가공(加工) 가공(加工) 기름틀(기름틀)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875 / 000
상세설명 [정의]
참깨·들깨·콩 등의 식물로 기름을 짜는 틀.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름틀의 구조는 가위다리모양으로 가랑이가 벌어진 나무의 머리 쪽에 구멍을 뚫고 지면과 약 30도의 각도를 이루도록 받침대를 세워 가랑이진 부분에는 홈을 파고 대롱을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박아서 짜여진 기름이 흘러내리도록 되어 있다. 깨가 든 주머니인 '기름떡'을 이 홈 위에 올려놓으며 그 위에 다시 '기름채 날' 너비 30㎝, 길이 2m 정도의 널쪽을 덮고 돌을 실어둔다. 또 다른 기름틀은 사다리 모양으로 두개의 세장을 걸어서 짠 머리틀을 지면에서 직각이 되게 세우고 아래 세장에 의지하여 서까래 같은 굵은 나무 둘을 약간 벌려놓으며 그 사이에 홈이 패인 널쪽인 '떡판'을 걸쳐둔다. 그리고 이에 기름떡을 올려놓은 뒤에 윗세장에 기름채날을 끼우고 무거운 돌을 실어서 압력을 가한다. 경상남도 진양에서는 팔자(八字)모양으로 벌어진 두툼한 나무 아래쪽에 세장을 끼우고 그 위에 서까래 같은 긴 나무를 좌우로 벌려둔다. 기름채날 중앙에는 둥근 구멍이 있어, 거기에 떡밥을 베보에 싸서 넣는다. 그리고 그 구멍에 알맞은 나무토막을 다시 올려놓은 뒤에 긴 기름채날을 끼우고 무거운 돌을 실어서 짠다. 이것은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떡밥에 더 큰 압력을 가할 수 있는 합리적인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또 조립도 간단한 장점이 있다. 우리의 재래식 기름틀로써는 하루에 한말의 기름을 짤 수 있다. 기름떡은 원료를 잘 씻은 다음 볶아서 절구에 찧었다가 다시 체에 곱게 내린다. 그리고, 그것을 기름주머니에 담아 솥에 넣고 김을 쬔 뒤에 식기 전에 짜야 한다.
1346 화로(火爐) 한국(韓國)
금속(金屬)
철제(鐵製)

용도기능 주(住) 생활용품(生活用品) 난방구(煖房具) 화로(火爐)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855 / 000
상세설명 [정의]
숯불을 담아놓는 그릇.
[개념]
오지·무쇠·놋쇠·곱돌 따위로 만들며 형태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또, 쓰임에 따라 불씨 보존 및 보온을 위한 것, 차를 달이는 것, 난방을 위한 것, 여행 때 가마 안에서 쓰던 수로(手爐) 따위로 나눌 수 있으나 몇 가지 구실을 함께 하는 것이 보통이다. 화로는 본디 화덕에서 비롯되었으며 등듸나 화투 또는 봉덕의 단계를 거쳐 완성된 기구이다.
[역사]
함경도 지방의 등듸는 선사시대의 화덕이 변형, 발전된 것이다. 청동기시대의 화덕은 집자리 가운데 땅을 오목하게 파고 주위에 어린아이 머리만한 돌들을 둘러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철기시대의 것은 그 테두리를 진흙으로 둘러놓아, 등듸가 이 시기에 완성되었음을 알려준다. 등듸는 정주간에서 부엌으로 내려가는 한 끝에 진흙으로 쌓아 만든 것으로(높이 20㎝, 긴지름 60㎝, 짧은지름 40㎝의 타원형) 땅바닥에 있던 화덕이 방 한 끝에 설치되는 첫 단계의 것이다. 이곳에 아궁이의 불을 떠 옮겨 묻어서 불씨를 보존하며 관솔 따위를 지펴서 조명을 하기도 하는데, 이를 우등불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싸리로 우산처럼 엮은 어리(개성에서는 '기태', 함경도에서는 '어룽태'라고 한다.)를 얹고 그 위에 젖은 옷이나 관솔 따위를 올려놓아 말리기도 한다. 제주도의 봉덕은 마루 한복판에(이것이 없는 집에서는 흙바닥에) 박아놓은 가로 50㎝, 세로 30㎝, 깊이 15㎝, 두께 5㎝쯤 되는 네모꼴의 돌이다. 이곳에 불을 지펴서 간단한 음식을 끓였으며 관솔불을 피워서 집안을 밝히기도 한다. 또, 추운 때에는 이 주위에서 잠을 잔다. 따라서, 봉덕은 일본의 이로리와 기능이 같은 셈이나 규모가 작고 주위에 앉을 사람의 자리가 정해져 있거나 하는 따위의 까다로운 제한이 없을 뿐이다. 강원도의 화투는 부뚜막 한쪽에 진흙을 이겨서 화로 모양으로 쌓은 것이다(높이 70∼80㎝). 위에는 솥을 걸 수 있도록 우묵한 자리를 내고 이와 별도로 아래쪽에 한 변의 길이가 20㎝쯤 되는 네모꼴의 구멍을 내었다. 위·아래 사이는 막혔으며 윗구멍에 불을 담아서 음식을 데우거나 집안도 밝힌다. 아랫구멍에는 불씨를 묻는다. 
[화로의 용도 및 특징]
예전에는 불씨가 집안의 재운을 좌우한다고 믿어서 집에 따라서는 불씨가 담긴 화로를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대대로 물려주었으며, 종가에서 분가할 때에는 그 집의 맏아들이 이사하는 새집에 불씨 화로를 들고 먼저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또,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거나 향교에서 제례를 올릴 때 향에 붙이는 불은 특정한 집에서 옮겨다 쓰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붙박이 시설들이 들어 옮길 수 있는 화로로 발전하자 그 용도는 매우 많아졌다. 아궁이의 대용은 물론이고 겨울철에는 빼놓을 수 없는 난방구의 하나가 되었다. 이것만큼 상하 계층이나 빈부의 차이 없이, 그리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두루 쓰이는 살림살이는 드물다. 농가에서 흔히 쓰던 질화로는 자배기를 닮아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쩍 벌어졌으며 좌우 양쪽에 손잡이가 있으나 받침은 달리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무쇠화로의 형태는 질화로와 비슷하나 손잡이가 밖으로 돌출되고 바닥에 발이 셋 달린다. 상류층에서 많이 쓴 놋쇠화로에는 비교적 너른 전이 달리고(전화로라고도 부른다.) 다리의 윗부분은 개다리처럼 앞으로 조금 돌출된 특징을 지닌다. 돌화로는 흔히 네모꼴을 이루며 둥근 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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