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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이미지 유물명 국적/시대 재질 상세보기
2505 연화문(蓮花文)숫막새(A)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지붕재(지붕재) 수막새(수막새)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0005 / 000
상세설명 [정의]
가옥의 지붕을 덮는 옥개용(屋蓋用)의 건축부재를 말한다.
[발달과정/역사]
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모골(模骨) 및 와범(瓦範) 등의 제작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서 제작한다. 한국에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한국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조적에 맞게 구조가 변형되어, 이른바 한국적인 양식으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3세기말 이후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 건물자리에서 비로소 와당이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는 각 국의 특징이 있는 와당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궐 및 사찰의 건축 조영을 담당하는 관서(官暑)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나라에서 쓰는 기와만을 전담하는 와박사(瓦博士)의 직제(職制)가 있었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었다. 신라에는 특별히 와당만을 제조하는 와기전(瓦器典)이란 마을이 있었으며,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기와 지붕은 기본적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그리고 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수막새는 수키와로 인해 형성된 기왓등의 끝에 막새부(드림새)를 접합시킨 기와이다. 막새부는 반원형·타원형인 것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원형인 것이 대부분이며, 그 문양 역시 각종 당초·보상화·동물·귀면 등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연꽃 문양이다. 연꽃 문양의 막새는 중앙에 연자(蓮子)를 담고 있는 원형의 씨방(子房)을 중심으로 주변에 연꽃잎의 문양대를 돌렸다. 연꽃잎은 잎의 배치 양상에 따라 단판·복판·중판으로 구분된다. 씨방과 연꽃잎 사이에 수술을 표현하기도 하며, 각각의 꽃잎 중심부에 꽃모양의 자엽(子葉)을 넣기도 하고, 연꽃잎과 더불어 보상화나 당초문을 함께 표현하여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한다. 원의 가장자리는 테두리로서 주연(周緣)이라고 부른다. 통일신라 이후부터는 주연에 구슬을 일정한 간격으로 연이어 배치해 놓은 무늬(連珠文)를 장식하기도 한다. 이 수막새는 주연(周緣) 부분이 결실된 상태이므로 직경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자방(子房)은 가장자리로 돌선대(突線帶)를 구획하고 볼록하게 처리하였으며 8과(果)의 연자(蓮子)가 확인되었다. 8엽(葉)의 연판(蓮瓣)은 2개의 양각선을 이용하여 중첩된 것처럼 배치하였다. 연판 중앙에 음각된 간선(間線)을 두어 2엽으로 분리시켰다. 주연(周緣)은 결실되어 그 형태를 알 수 없다. 배면은 희미한 포흔(布痕)이 군데군데 확인되었다.
2504 『신복사(神福寺)』명문 평기와편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지붕재(지붕재) 암키와(암키와)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0004 / 000
상세설명 [정의]
가옥의 지붕을 덮는 옥개용(屋蓋用)의 건축부재를 말한다.
[발달과정/역사]
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모골(模骨) 및 와범(瓦範) 등의 제작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서 제작한다. 한국에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한국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조적에 맞게 구조가 변형되어, 이른바 한국적인 양식으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3세기말 이후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 건물자리에서 비로소 와당이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는 각 국의 특징이 있는 와당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궐 및 사찰의 건축 조영을 담당하는 관서(官暑)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나라에서 쓰는 기와만을 전담하는 와박사(瓦博士)의 직제(職制)가 있었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었다. 신라에는 특별히 와당만을 제조하는 와기전(瓦器典)이란 마을이 있었으며,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기와 지붕은 기본적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그리고 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은 먼저 수키와(圓瓦, 夫瓦)와 암키와(平瓦, 女瓦)로 이어 덮게 되는데, 대부분의 수키와와 암키와는 원통형의 목제 모골의 외측에 마포나 무명 등의 포목을 감고 양질의 진흙을 다진 점토판(粘土板)을 씌워 고판(叩板)으로 두들겨 얼마 동안의 건조기간을 거친 다음에 와도(瓦刀)로 2분하거나 3분 또는 4분하여 제작한다. 형태에 따라 기와의 끝에 언강이라고 부르는 낮은 단(段)이 있어서 미구를 내밀고 있는 유단식(有段式)과 , 언강과 미구가 없는 토시형의 무단식(無段式)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대부분 그 표면에 선(線)·승석(繩蓆)·격자(格字)·화엽(花葉) 등의 고판무늬가 장식되고 있다. 이 기와의 『신복사(神福寺)』명문은 기와의 중앙에 위치한다. 등문양은 엉성한 수지문(樹枝文)으로 되어 있다. 선의 굵기는 03.㎝이고 선과의 간격은 0.35㎝이다. 배면은 포흔이 잘 남아 있다. 회흑색을 띠며 시립을 함유한 정선된 태토를 사용하였다.
2503 『안국(安國)』명문 평기와편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지붕재(지붕재) 암키와(암키와)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0003 / 000
상세설명 [정의]
가옥의 지붕을 덮는 옥개용(屋蓋用)의 건축부재를 말한다.
[발달과정/역사]
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모골(模骨) 및 와범(瓦範) 등의 제작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서 제작한다. 한국에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한국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조적에 맞게 구조가 변형되어, 이른바 한국적인 양식으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3세기말 이후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 건물자리에서 비로소 와당이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는 각 국의 특징이 있는 와당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궐 및 사찰의 건축 조영을 담당하는 관서(官暑)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나라에서 쓰는 기와만을 전담하는 와박사(瓦博士)의 직제(職制)가 있었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었다. 신라에는 특별히 와당만을 제조하는 와기전(瓦器典)이란 마을이 있었으며,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기와 지붕은 기본적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그리고 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은 먼저 수키와(圓瓦, 夫瓦)와 암키와(平瓦, 女瓦)로 이어 덮게 되는데, 대부분의 수키와와 암키와는 원통형의 목제 모골의 외측에 마포나 무명 등의 포목을 감고 양질의 진흙을 다진 점토판(粘土板)을 씌워 고판(叩板)으로 두들겨 얼마 동안의 건조기간을 거친 다음에 와도(瓦刀)로 2분하거나 3분 또는 4분하여 제작한다. 형태에 따라 기와의 끝에 언강이라고 부르는 낮은 단(段)이 있어서 미구를 내밀고 있는 유단식(有段式)과 , 언강과 미구가 없는 토시형의 무단식(無段式)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대부분 그 표면에 선(線)·승석(繩蓆)·격자(格字)·화엽(花葉) 등의 고판무늬가 장식되고 있다. 이 기와의 『안국(安國)』명문은 기와 중앙에 위치한다. 등문양은 수지문(樹枝文)가 정방형(正方形)과 격자문(格子文)이 시문되었는데 전체적으로 희미하게 남아 있다. 짙은 회청색이며 약간의 석림을 ?유하고 정선된 태토를 사용하였다. 배면에는 치밀한 포흔이 잘 남아 있다.
2502 『안국사(安國寺)』명문 평기와편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지붕재(지붕재) 암키와(암키와)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0002 / 000
상세설명 [정의]
가옥의 지붕을 덮는 옥개용(屋蓋用)의 건축부재를 말한다.
[발달과정/역사]
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모골(模骨) 및 와범(瓦範) 등의 제작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서 제작한다. 한국에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한국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조적에 맞게 구조가 변형되어, 이른바 한국적인 양식으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3세기말 이후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 건물자리에서 비로소 와당이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는 각 국의 특징이 있는 와당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궐 및 사찰의 건축 조영을 담당하는 관서(官暑)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나라에서 쓰는 기와만을 전담하는 와박사(瓦博士)의 직제(職制)가 있었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었다. 신라에는 특별히 와당만을 제조하는 와기전(瓦器典)이란 마을이 있었으며,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기와 지붕은 기본적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그리고 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은 먼저 수키와(圓瓦, 夫瓦)와 암키와(平瓦, 女瓦)로 이어 덮게 되는데, 대부분의 수키와와 암키와는 원통형의 목제 모골의 외측에 마포나 무명 등의 포목을 감고 양질의 진흙을 다진 점토판(粘土板)을 씌워 고판(叩板)으로 두들겨 얼마 동안의 건조기간을 거친 다음에 와도(瓦刀)로 2분하거나 3분 또는 4분하여 제작한다. 형태에 따라 기와의 끝에 언강이라고 부르는 낮은 단(段)이 있어서 미구를 내밀고 있는 유단식(有段式)과 , 언강과 미구가 없는 토시형의 무단식(無段式)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대부분 그 표면에 선(線)·승석(繩蓆)·격자(格字)·화엽(花葉) 등의 고판무늬가 장식되고 있다. 이 기와의 『안국사(安國寺)』명문은 기와 하단 3.3㎝ 위에서부터 새겨졌다. 등문양은 비교적 가는 선으로 이루어진 수지문(樹枝文)과 종집선문(縱集線文), 사선문(斜線文)이 복합적으로 시문되어 있다. 1개의 문양간격은 5.5㎝이다. 선의 굵기는 0.15㎝이고 선과의 간격은 0.16㎝이다. 배면은 포흔이 남아 있다. 회백색을 띠며 시립을 함유한 태토를 사용하였다.
2501 『안국사(安國寺)』명문 평기와편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지붕재(지붕재) 암키와(암키와)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0001 / 000
상세설명 [정의]
가옥의 지붕을 덮는 옥개용(屋蓋用)의 건축부재를 말한다.
[발달과정/역사]
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모골(模骨) 및 와범(瓦範) 등의 제작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서 제작한다. 한국에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한국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조적에 맞게 구조가 변형되어, 이른바 한국적인 양식으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3세기말 이후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 건물자리에서 비로소 와당이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는 각 국의 특징이 있는 와당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궐 및 사찰의 건축 조영을 담당하는 관서(官暑)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나라에서 쓰는 기와만을 전담하는 와박사(瓦博士)의 직제(職制)가 있었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었다. 신라에는 특별히 와당만을 제조하는 와기전(瓦器典)이란 마을이 있었으며,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기와 지붕은 기본적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그리고 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은 먼저 수키와(圓瓦, 夫瓦)와 암키와(平瓦, 女瓦)로 이어 덮게 되는데, 대부분의 수키와와 암키와는 원통형의 목제 모골의 외측에 마포나 무명 등의 포목을 감고 양질의 진흙을 다진 점토판(粘土板)을 씌워 고판(叩板)으로 두들겨 얼마 동안의 건조기간을 거친 다음에 와도(瓦刀)로 2분하거나 3분 또는 4분하여 제작한다. 형태에 따라 기와의 끝에 언강이라고 부르는 낮은 단(段)이 있어서 미구를 내밀고 있는 유단식(有段式)과 , 언강과 미구가 없는 토시형의 무단식(無段式)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대부분 그 표면에 선(線)·승석(繩蓆)·격자(格字)·화엽(花葉) 등의 고판무늬가 장식되고 있다. 이 기와의 안국사(安國寺)명문은 기와 하단에 위치한다. 등문양은 비교적 가는 선으로 이루어진 수지문(樹枝文)과 종집선문(縱集線文), 사선문(斜線文)이 복합적으로 시문되었으며 수지문은 군데군데 중복되었다. 등문양은 약 6㎝ 간격으로 1개씩 새겨졌다. 선의 굵기는 0.1㎝ 이고 선과의 간격은 0.2㎝ 이다. 배면은 포흔(布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짙은 회청색이며 사립을 함듀한 태토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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