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
이미지 |
유물명 |
국적/시대 |
재질 |
상세보기 |
26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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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추차 |
한국(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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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제(土製) 기타(其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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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기능 |
산업/생업(産業/生業) 공업(工業) 염직(染織) 방추차(방추차) |
장르 |
기타(其他) 기타(其他) |
유물번호 |
000004 / 000 |
상세설명 |
[정의]
실을 뽑을 때 사용하는 방적구의 일종.
[발달과정/역사]
섬유를 꼬아 실을 만드는 방적기구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한국에서는 황해도 지탑리(智塔里), 강원도 오산리(鰲山里), 한강 중류 흔암리(欣巖里) 등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는데 바늘이 실에 감긴 채 출토된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 이후부터 사용된 것으로 여겨지며, 청동기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BC 5세기∼AD 6세기부터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청동기시대 이후의 것은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은 방차를 써서 삼[麻]과 같은 식물섬유를 뽑아 평직물을 짰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섬유를 꼬아 실을 만드는 방적기구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선사시대의 가락바퀴는 원반모양, 팽이모양, 주판알모양, 공모양 등이 있다. 가락바퀴의 가운데에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고, 이 구멍에 가락바퀴의 축이 될 막대를 넣고 그 축을 돌리는 방법으로 실을 고아서 뽑는데 사용한다. 재질로 보면 흙을 빚어서 구운 것, 돌로 만든 것, 또는 질그릇 조각을 갈아서 만든 것 등이 있는데 선사시대에는 주로 흙을 빚어서 구운 것이 많다. 이 가락바퀴는 황갈색을 띠는 원형의 토제(土製) 방추차로 경질소성이다. 상하면(上下面)은 납작하고 측면(側面)은 약간 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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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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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 |
한국(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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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제(土製) 경질(硬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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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기능 |
사회생활(社會生活) 의례생활(儀禮生活) 상장(喪葬) 고대부장품(古代副葬品) |
장르 |
기타(其他) 기타(其他) |
유물번호 |
000003 / 000 |
상세설명 |
[정의]
토기(土器)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이다.
[발달과정/역사]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신석기시대 이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과거의 수렵·채집생활에서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착생활로 전환하면서 식량을 저장하고, 식수를 담아두는 용기가 필요하게 되면서 출현하였다. 처음에는 자연적인 구덩이나 풀로 만든 바구니, 목기 등을 토기 대신에 사용하였으나 점차 흙을 반죽하여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 말려서 쓰게 되는데 우연한 기회에 불에 타서 단단해진 것을 보고 토기가 발명되었다고 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토기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보통 500~1000℃이하에서 구워지지만 그 이상에서 구워진 것은 도기(陶器)라 부르는데,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나오는 유약을 바른 자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토기라 부른다. 토기는 만들기 쉬운 반면 부서지기 쉬워서 신석기시대 이래로 유적 출토품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물이다. 각 시대별로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주류를 이루며 덧띠무늬토기(隆起文土器), 단도마연(丹塗磨硏)토기, 가지무늬(彩文)토기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는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紅陶), 검은간토기(黑陶) 등이 있다. 철기시대에는 민무늬토기와 타날문토기가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각각 특징적인 토기들이 제작·사용되었다. 고구려는 중국과 가까워 그 영향을 많이 받아, 한식(漢式)계통의 회색 또는 흑회색의 납작바닥토기, 손잡이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백제토기는 승석문(繩蓆文)이 보편적으로 시문되고, 삼족기가 존재하며 납작바닥토기가 많고, 형태가 특이한 그릇받침(器臺)가 출토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신라토기는 타날문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정선된 태토에 굴가마에서 환원염으로 구웠으며 녹로를 사용하여 다량으로 생산하였다. 밀폐된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진 신라토기는 두드리면 금속성의 소리를 내는 아주 단단한 것으로 그릇의 종류로는 긴목항아리(長頸壺), 짧은목항아리(短頸壺), 굽다리접시(高杯) 등이 중심을 이루고, 이외에도 그릇받침(器臺), 손잡이달린잔(把手附盞), 동물·배·뿔 모양의 토기들도 있다. 이 토기는 구연단과 개신 일부가 결실된 경질소성의 회청색 고배 뚜껑이다. 굵은 석립이 함유된 바탕흙을 이용하여 표면은 거침감을 준다. 꼭지는 環形이나 기형의 일부가 휘어져 조잡한 양상을 보인다. 반구형의 개신부에 턱은 수평으로 약간 돌출되었으며, 짧은 구연은 말리듯 내경한다. 별다른 시문은 관찰되지 않으며, 외면에 회전물손질한 흔적이 내면에는 빗질한 잔흔이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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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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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 |
한국(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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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제(土製) 경질(硬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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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기능 |
사회생활(社會生活) 의례생활(儀禮生活) 상장(喪葬) 고대부장품(古代副葬品) |
장르 |
기타(其他) 기타(其他) |
유물번호 |
000002 / 000 |
상세설명 |
[정의]
토기(土器)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이다.
[발달과정/역사]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신석기시대 이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과거의 수렵·채집생활에서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착생활로 전환하면서 식량을 저장하고, 식수를 담아두는 용기가 필요하게 되면서 출현하였다. 처음에는 자연적인 구덩이나 풀로 만든 바구니, 목기 등을 토기 대신에 사용하였으나 점차 흙을 반죽하여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 말려서 쓰게 되는데 우연한 기회에 불에 타서 단단해진 것을 보고 토기가 발명되었다고 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토기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보통 500~1000℃이하에서 구워지지만 그 이상에서 구워진 것은 도기(陶器)라 부르는데,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나오는 유약을 바른 자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토기라 부른다. 토기는 만들기 쉬운 반면 부서지기 쉬워서 신석기시대 이래로 유적 출토품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물이다. 각 시대별로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주류를 이루며 덧띠무늬토기(隆起文土器), 단도마연(丹塗磨硏)토기, 가지무늬(彩文)토기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는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紅陶), 검은간토기(黑陶) 등이 있다. 철기시대에는 민무늬토기와 타날문토기가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각각 특징적인 토기들이 제작·사용되었다. 고구려는 중국과 가까워 그 영향을 많이 받아, 한식(漢式)계통의 회색 또는 흑회색의 납작바닥토기, 손잡이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백제토기는 승석문(繩蓆文)이 보편적으로 시문되고, 삼족기가 존재하며 납작바닥토기가 많고, 형태가 특이한 그릇받침(器臺)가 출토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신라토기는 타날문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정선된 태토에 굴가마에서 환원염으로 구웠으며 녹로를 사용하여 다량으로 생산하였다. 밀폐된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진 신라토기는 두드리면 금속성의 소리를 내는 아주 단단한 것으로 그릇의 종류로는 긴목항아리(長頸壺), 짧은목항아리(短頸壺), 굽다리접시(高杯) 등이 중심을 이루고, 이외에도 그릇받침(器臺), 손잡이달린잔(把手附盞), 동물·배·뿔 모양의 토기들도 있다. 이 토기는 경질소성의 고배 뚜껑으로 훼손된 것을 복원하였다. 색조는 연한 회청색에 갈색빛이 감도며, 턱의 내면에는 자연유약이 흡착되어 있으나 대부분이 탈락된 상태이다. 꼭지는 환형(環形)으로 단을 둥글게 말아 처리하였으며, 개신부는 반구형으로 완만히 떨어진다. 턱은 사면으로 뻗어내리면서 약간 돌출하는 형상이며, 짧은 구연은 내경한다. 개신부 중앙 한편에 「///」이 음각 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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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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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경호 |
한국(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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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제(土製) 경질(硬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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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기능 |
사회생활(社會生活) 의례생활(儀禮生活) 상장(喪葬) 고대부장품(古代副葬品) |
장르 |
기타(其他) 기타(其他) |
유물번호 |
000001 / 000 |
상세설명 |
[정의]
토기(土器)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이다.
[발달과정/역사]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신석기시대 이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과거의 수렵·채집생활에서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착생활로 전환하면서 식량을 저장하고, 식수를 담아두는 용기가 필요하게 되면서 출현하였다. 처음에는 자연적인 구덩이나 풀로 만든 바구니, 목기 등을 토기 대신에 사용하였으나 점차 흙을 반죽하여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 말려서 쓰게 되는데 우연한 기회에 불에 타서 단단해진 것을 보고 토기가 발명되었다고 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토기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보통 500~1000℃이하에서 구워지지만 그 이상에서 구워진 것은 도기(陶器)라 부르는데,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나오는 유약을 바른 자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토기라 부른다. 토기는 만들기 쉬운 반면 부서지기 쉬워서 신석기시대 이래로 유적 출토품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물이다. 각 시대별로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주류를 이루며 덧띠무늬토기(隆起文土器), 단도마연(丹塗磨硏)토기, 가지무늬(彩文)토기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는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紅陶), 검은간토기(黑陶) 등이 있다. 철기시대에는 민무늬토기와 타날문토기가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각각 특징적인 토기들이 제작·사용되었다. 고구려는 중국과 가까워 그 영향을 많이 받아, 한식(漢式)계통의 회색 또는 흑회색의 납작바닥토기, 손잡이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백제토기는 승석문(繩蓆文)이 보편적으로 시문되고, 삼족기가 존재하며 납작바닥토기가 많고, 형태가 특이한 그릇받침(器臺)가 출토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신라토기는 타날문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정선된 태토에 굴가마에서 환원염으로 구웠으며 녹로를 사용하여 다량으로 생산하였다. 밀폐된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진 신라토기는 두드리면 금속성의 소리를 내는 아주 단단한 것으로 그릇의 종류로는 긴목항아리(長頸壺), 짧은목항아리(短頸壺), 굽다리접시(高杯) 등이 중심을 이루고, 이외에도 그릇받침(器臺), 손잡이달린잔(把手附盞), 동물·배·뿔 모양의 토기들도 있다. 이 토기는 경질소성의 회청색 단경호이다. 구연부가 조금 결실되었을뿐 완형에 가깝다. 구연부는 외반하며 구연단은 수평을 이룬다. 구연에서 동체 상부까지 담녹색의 자연유가 흡착되어 있으며, 동체부는 구형이고 바닥은 원저이다. 태토는 정선된 사질점토를 이용하였으며, 소성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회전 물손질한 후에 빗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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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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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추 |
한국(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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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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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기능 |
산업/생업(産業/生業) 어업(漁業) 어로(漁撈) 어망추(漁網錘) |
장르 |
기타(其他) 기타(其他) |
유물번호 |
000007 / 000 |
상세설명 |
[정의]
그물에 매달아서 그물이 물 속에 가라앉게 하는 어로 도구.
[발달과정/역사]
원시 및 고대사회에서 사용되었던 그물의 존재는 부자(浮子), 망(網), 침자(沈子) 가운데 침자인 그물추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지만, 부자와 그물은 유기물로 만들어졌기 한국과 같은 산성토양에서는 남아 있기 어렵다. 다만 그물의 경우는 간접적으로 그 존재를 알려주고 있는데 예를 들면 동삼동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에 그물의 눌린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토기로 보아 그 해당시기는 신석기시대 전기이며 그물눈(편목)은 6㎝미만이다. 그물추에서 신석시대에 유구석추(有溝石錘), 토기편추(土器片錘), 절목석추(切目石錘), 양자강형토추(楊子江形土錘) 등이 출토되며 청동기시대에는 유구석·토추(有溝石·土錘), 토기편추, 절목석추, 관상토추(管狀土錘), 원판형 토추(圓板形土錘) 등이 나온다. 철기시대에는 유구토추, 절목석추, 관상토추 3종이 있다. 그밖에 유공석추(有孔石錘), 납작한 자갈의 양끝을 떼어낸 역석추(礫石錘) 등이 있으며 이들 그물추의 생김새는 그 이후 삼국시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간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신석시시대의 그물추 가운데 유구석추는 한반도 동북지방의 해안에서 등장하여 청동기시대까지 사용된다. 한편 유구석추는 원삼국시대에 동북지방과 연해주에서 나오고 있다. 토기편추는 동북지방과 서북지방에 집중하여 분포되며 남부지방에서는 봉계리 유적에서만 출토된 바 있다. 토기편추는 청동시대가 되면 대동강유역이나 서울의 한강유역까지 그 분포범위가 확대된다. 이 무렵에는 재질의 변화가 일어나 서북지방에서는 절목석추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대동강유역에서 남하하여 남한강의 상류에서도 출현하고 있다. 한편 한강유역에서는 토기편추가 유구토추와 원판형토추의 사용으로 흐름이 바뀌는데 유구토추는 남부지방의 서부지역까지, 원판형토추는 남부지방 동북내륙지방까지 연결된다. 시기적으로는 남부지방 서부지역까지 내려온 유구토추는 철기시대까지 계속되지만 원판형토추는 청동기시대에 소멸되고 만다. 이와는 달리 전혀 새로운 모습의 관상토추가 서북지방에 등장하는데 이것은 중국 동북지방의 것과 관련 있다고 보인다. 관상토추는 한반도 동해안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발견된다. 삼국시대에는 관상토추가 그물추로 정형화하여 합천 저포리 B지구 고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껴묻거리(副葬品)로도 매납된다. 관상토추의 급격한 보급은 제작의 편리함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관상토추는 가는 줄기에 그물의 용도에 맞추어 점토을 적당한 크기로 쥐어놓고 이것을 응달에서 말린 다음 구움으로서 한 번에 대량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한 번씩 쥐었던 흔적은 미사리 유적에서 출토된 관상토추에 생생하게 남아 있으므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경향과는 별도로 제주도에서는 유공석추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물론 유공석추의 뒤를 잇는 것은 관상토추이다. 이 그물추는 석재를 이용한 그물추이다. 양쪽으로 홈떼기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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