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
이미지 |
유물명 |
국적/시대 |
재질 |
상세보기 |
1315 |
|
올챙이국수틀 |
한국(韓國)
|
나무(나무)
|
|
용도기능 |
식(食) 가공(加工) 가공(加工) 국수틀(국수틀) |
장르 |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
유물번호 |
002626 / 000 |
상세설명 |
[정의]
가루를 반죽하여 통에 넣고 공이로 눌러서 국수를 뽑아내는 틀.
[역사]
고려시대에는 사찰을 중심으로 제면업을 하였으므로 이미 국수틀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그 구조나 모양은 전하지 않는다. 국수틀에 관한 기록은 18세기의 ≪임원십육지≫ 섬용지(贍用志)에 비로소 보인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국수틀을 면자(膽趺)라고 하며 그 형태를 "큰 통나무를 중간이 부르도록 잘 다듬어서 그 중간에 구멍을 뚫는다. 그 구멍의 지름이 4∼5촌이고 이 둥근 구멍의 안을 무쇠로 싸고 그 바닥에 작은 구멍을 무수히 뚫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국수집에서는 큰 솥 위에 국수틀을 걸고, 반죽을 구멍 안에 넣은 다음 공이로 눌러, 솥 안으로 국수가 흘러들어가 삶아지게끔 설치하였다. 근래에 말린 밀국수가 시판되면서 국수틀도 기계화되었다. 즉, 반죽을 통에 넣고 손으로 돌리면 압력이 가해져 구멍으로 국수가 빠져나오게 된 것이다. 현재는 전동력으로 압력을 가해서 만드는 틀을 쓴다. 이 국수틀은 가루를 반죽하여 국수분통에 넣고 눌러서 가닥이 빠져나오게 되어 있는데 그 모양이 올챙이 모양 같아 올챙이 국수틀이라고도 한다.
|
|
1314 |
|
올챙이국수틀 |
한국(韓國)
|
나무(나무)
|
|
용도기능 |
식(食) 가공(加工) 가공(加工) 국수틀(국수틀) |
장르 |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
유물번호 |
002625 / 000 |
상세설명 |
[정의]
가루를 반죽하여 통에 넣고 공이로 눌러서 국수를 뽑아내는 틀.
[역사]
고려시대에는 사찰을 중심으로 제면업을 하였으므로 이미 국수틀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그 구조나 모양은 전하지 않는다. 국수틀에 관한 기록은 18세기의 ≪임원십육지≫ 섬용지(贍用志)에 비로소 보인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국수틀을 면자(膽趺)라고 하며 그 형태를 "큰 통나무를 중간이 부르도록 잘 다듬어서 그 중간에 구멍을 뚫는다. 그 구멍의 지름이 4∼5촌이고 이 둥근 구멍의 안을 무쇠로 싸고 그 바닥에 작은 구멍을 무수히 뚫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국수집에서는 큰 솥 위에 국수틀을 걸고, 반죽을 구멍 안에 넣은 다음 공이로 눌러, 솥 안으로 국수가 흘러들어가 삶아지게끔 설치하였다. 근래에 말린 밀국수가 시판되면서 국수틀도 기계화되었다. 즉, 반죽을 통에 넣고 손으로 돌리면 압력이 가해져 구멍으로 국수가 빠져나오게 된 것이다. 현재는 전동력으로 압력을 가해서 만드는 틀을 쓴다. 이 국수틀은 가루를 반죽하여 국수분통에 넣고 눌러서 가닥이 빠져나오게 되어 있는데 그 모양이 올챙이 모양 같아 올챙이 국수틀이라고도 한다.
|
|
1313 |
|
장군(缶) |
한국(韓國)
|
토제(土製)
|
|
용도기능 |
산업/생업(産業/生業) 농업(農業) 운반(運搬) 장군(장군) |
장르 |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
유물번호 |
002624 / 000 |
상세설명 |
[정의]
물·술·간장·오줌 따위를 담는데 쓰는 그릇.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중두리를 뉘어놓은 모양의 것으로 한쪽 마구리는 평평하고 다른 쪽 마구리는 반구형(半球形)이며, 배때기에 좁은 아가리를 붙였다. 오지로 만든 작은 것에는 물이나 술 따위를 넣으나 큰 것에는 오줌을 담아 지게로 운반한다. 이를 오줌장군·오줌추마리(경상남도 영산)·소매장군(전라남도 보성)·장군(전라남도 보성·구례, 강원도 명주) 등으로 부른다. 장군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큰 것은 지름 30㎝, 길이 60㎝ 정도로서 서말의 오줌이 들어가며, 작은 것은 한 말들이도 있다. 강원도의 오줌장군은 한쪽 마구리를 봉긋하게 오그리고 끝에 깃봉모양의 돌기를 붙였다. 이것은 손잡이다. 들어 내리거나 오줌을 쏟기 위하여 한쪽으로 기울일 때 이용한다.
한편, 충청도일대에서는 항아리처럼 배가 부르고 위쪽에 주둥이가 달렸으며 양쪽에 손잡이를 붙인 것을 쓴다. 이것을 지게에 얹어 보리밭으로 나른 다음에 오줌을 새갓통에 따라서 준다. 오줌장군 가운데에는 쪽나무를 모아 통을 걸어서 만든 나무장군이 있다. 가운데가 약간 부르고, 양끝은 조금 작으며, 오지장군처럼 가운데에 주둥이를 달았다. 몸 주위로는 대를 둘러 감아 고정시키고 주둥이는 단단한 나무를 깎아 박는다. 나무장군은 오줌뿐 아니라 거름을 담아 나르기도 한다. 작은 것에는 두 말, 큰 것에는 너 말을 담는다. 나무장군은 오지장군처럼 깨지지 않는 장점이 있어 공사장에서 물을 져 나르는 데에도 썼다. 수원성을 쌓은 내력을 적은 〈화성의궤(華城儀軌)〉에 그림이 실려 있다. 그러나 나무장군은 쓰지 않을 때 나무쪽이 오그라들어서 조각이 나는 일이 많아 다시 결어야 하는 불편이 있다. 유중림(柳重臨)은 ≪증보산림경제≫에 장군을 장분(長盆)으로 적었다.
|
|
1312 |
|
나막신 |
한국(韓國)
|
나무(나무)
|
|
용도기능 |
의(衣) 신발(신발) 혜/리(鞋/履) 나막신(나막신) |
장르 |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
유물번호 |
002618 / 000 |
상세설명 |
[정의]
비가 올 때 신던 나무로 만든 신.
[개설]
나무를 파서 만든 신. 격지·목극(木珖)·각색(脚龍)·목리(木履)·목혜(木鞋)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 말기에 나막신으로 통칭되었는데, 이는 '나무신'이 와전된 것이다. 지방에 따라 나막개·나모께·나무신·목신·남신·나막개짝·토막신·껏두기·미엉·남박신·나묵신·나묵개·나맥신·나목신·나목개 등 다양하게 불린다. 나막신은 주로 비올 때 신는 신발로서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
고대에도 있었는지는 확증할 문헌이나 유물이 없고, 조선 중기 이후에 많은 기록과 유물을 볼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나막신이 처음 나타났을 때의 형태를 알 수는 없으나 처음에는 평판(平板)에 끈을 하였던 것이 차츰 사방에 울을 하게 되고, 굽을 달아 극(珖)의 형식으로 발달하여 요즈음 볼 수 있는 나막신으로 변하였다. 이와 같이 평극에 울과 굽을 다는 형식으로 된 것은 비올 때에 발에 물이나 진흙이 튀어 들어가는 불편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막신의 형태를 보면 평극, 굽이 있는 것, 굽이 없는 것, 굽에 징이 박힌 것 등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남자아이가 신는 무늬 있는 것〔彩珖〕등이 있었고, 평극은 보이지 않는다. 재료는 다양하게 사용되었는데 특히 오동나무와 버드나무로 만든 것을 제일로 쳤다. 나무의 속성이 마르면 터지기 쉬우므로, 밀납을 녹여 겉에다 칠해서 납극(蠟珖)을 만들어 신기도 하였다. 나막신은 상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신었는데 굽이 높아서 비나 눈이 올 때는 좋으나, 무겁고 활동적이 못 되어 말을 탈 때나 먼길을 갈 때는 신지 않았다. 맑은 날에도 많이 신었으며, 특히 어린 남자아이가 신었던 채극은 진신으로서뿐만 아니라 마른신으로도 신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나막신을 신고 소리내어 지나가는 것이 오만하다고 하여, 천인이나 젊은이는 양반이나 어른 앞에서는 감히 착용할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말에는 청빈한 선비의 신처럼 여겨졌는데, 양반은 가난하더라도 상민처럼 짚신이나 미투리 같은 것은 절대로 신지 않았으므로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가난한 선비가 많이 살았던 것으로 이름난 남산골의 선비들이 그러하였다 하여 이들을 '남산골 딸깍발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렇듯 널리 신겨지다가 1910년 이후 고무신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고 질긴 고무신을 신게 되어 차츰 쇠퇴하여, 1940년대를 전후하여서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
|
1311 |
|
토기병(土器甁) |
한국(韓國)
|
토제(土製) 경질(硬質) |
|
용도기능 |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병(甁)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병(甁) |
장르 |
기타(其他) 기타(其他) |
유물번호 |
002617 / 000 |
상세설명 |
[정의]
토기(土器)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이다.
[발달과정/역사]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신석기시대 이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과거의 수렵·채집생활에서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착생활로 전환하면서 식량을 저장하고, 식수를 담아두는 용기가 필요하게 되면서 출현하였다. 긴목항아리는 신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에 이르가까지 계속 사용된다. 특히 신라와 가야에서 크게 유행하였는데, 신라의 것은 어깨목이 각을 이루며 바닥에 대(臺)가 달리는 경우가 많고 동체(胴體)에 기하학적 무늬가 있고 토우(土偶)를 붙이기도 한다. 가야(伽耶)의 것은 어깨와 목이 곡선으로 이어지며, 대가 없고 따로 만들어진 굽받침이나 높은 받침대 위에 올려진다. 무늬는 물결무늬(波狀文)가 주류를 이룬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토기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보통 500~1000℃이하에서 구워지지만 그 이상에서 구워진 것은 도기(陶器)라 부르는데,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나오는 유약을 바른 자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토기라 부른다. 토기는 만들기 쉬운 반면 부서지기 쉬어서 신석기시대 이래로 유적 출토품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물이다. 각 시대별로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주류를 이루며 덧띠무늬토기(隆起文土器), 단도마연(丹塗磨硏)토기, 가지무늬(彩文)토기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는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紅陶), 검은간토기(黑陶) 등이 있다. 철기시대에는 민무늬토기와 타날문도기가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각각 특징적인 토기들이 제작·사용되었다. 고구려는 중국과 가까워 그 영향을 많이 받아, 한식(漢式)계통의 회색 또는 흑회색의 납작바닥토기, 손잡이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백제토기는 승석문(繩蓆文)이 보편적으로 시문되고, 삼족기가 존재하며 납작바닥토기가 많고, 형태가 특이한 그릇받침(器臺)가 출토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신라토기는 타날문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정선된 태토에 굴가마에서 환원염으로 구웠으며 녹로를 사용하여 다량으로 생산하였다. 밀폐된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진 신라토기는 두드리면 금속성의 소리를 내는 아주 단단한 것으로 그릇의 종류로는 긴목항아리(長頸壺), 짧은목항아리(短頸壺), 굽다리접시(高杯) 등이 중심을 이룬다. 이 토기는 구부(口部)가 넓게 벌어졌고, 좁아진 목이 어깨에서부터 벌어져 풍만한 동체(胴體)를 이루다가 세워진 둥근 동체(胴體)의 병이다. 표면은 회청색을 띠며, 동체(胴體) 일부가 산화 변색되어 있다. 겉면에 타날(打捺) 기법에 의한 삿자리무늬(繩蓆文)가 희미하게 남아있고, 물레 성형 흔적이 남아있다. 바닥은 평저(平底)이나 약간 안으로 들어가 있다. 구연(口緣)이 일부 결실되었고, 동체(胴體)에 탐침봉에 의한 구멍이 나있다. 기면(器面)이 고르지 않다. 경질토기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