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
이미지 |
유물명 |
국적/시대 |
재질 |
상세보기 |
2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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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바퀴 |
한국(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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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제(土製) 기타(其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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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기능 |
산업/생업(産業/生業) 공업(工業) 염직(染織) 방추차(방추차) |
장르 |
기타(其他) 기타(其他) |
유물번호 |
000019 / 000 |
상세설명 |
[정의]
실을 뽑을 때 사용하는 방적구의 일종.
[발달과정/역사]
섬유를 꼬아 실을 만드는 방적기구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한국에서는 황해도 지탑리(智塔里), 강원도 오산리(鰲山里), 한강 중류 흔암리(欣巖里) 등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는데 바늘이 실에 감긴 채 출토된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 이후부터 사용된 것으로 여겨지며, 청동기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BC 5세기∼AD 6세기부터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청동기시대 이후의 것은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은 방차를 써서 삼[麻]과 같은 식물섬유를 뽑아 평직물을 짰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섬유를 꼬아 실을 만드는 방적기구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선사시대의 가락바퀴는 원반모양, 팽이모양, 주판알모양, 공모양 등이 있다. 가락바퀴의 가운데에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고,이 구멍에 가락바퀴의 축이 될 막대를 넣고 그 축을 돌리는 방법으로 실을 고아서 뽑는데 사용한다. 재질로 보면 흙을 빚어서 구운 것, 돌로 만든 것, 또는 질그릇 조각을 갈아서 만든 것 등이 있는데 선사시대에는 주로 흙을 빚어서 구운 것이 많다. 이 가락바퀴는 방형의 형태로 회청색을 띤다. 구멍은 한면은 0.6㎝, 다른면은 0.8㎝로 일정치 않으며, 서로 관통이 안된 상태이다. 가는 모래가 혼입되었으며, 정선된 태토이고 두께는 1.7-2.0㎝로 일정치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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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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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도끼 |
한국(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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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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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기능 |
산업/생업(産業/生業) 임업(林業) 임산물생산(林産物生産) 도끼(도끼) |
장르 |
기타(其他) 기타(其他) |
유물번호 |
000018 / 000 |
상세설명 |
[정의]
돌을 가공하여 만든 도끼모양의 연모.
[발달과정/역사]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심지어는 철기시대에까지 인류가 가장 장기간에 걸쳐 사용한 석기로, 굴지, 벌채 등과 수렵, 전투용으로도 사용된 다목적용이다. 구석기시대에는 주먹도끼가 대표적으로 손으로 쥐는 부분은 둔탁하게, 그리고 사용 부분은 뾰족하게 만든 것이 그 기본형이다. 구석기시대 전기부터 사용되는데, 한국에서는 공주 석장리와 연천 전곡리 등의 예가 있다. 주먹도끼로 발전하기 전까지는 날 부분만 적당히 다듬은 찍개가 사용된바 있다. 신석기시대에는 납작한 강자갈을 직접 내지 간접 타법의 수법으로 만든 깬돌도끼(打製石斧)가 보편적으로 많이 제작 사용된다. 또한 날 부분만 마연수법으로 다듬고 나머지는 타제로 조정한 국부간돌도끼(局部磨製石斧) 또한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제작 사용되는데, 제주 고산리 유적의 예가 대표적이다. 전면을 잔다듬으로 곱게 성형하고 날부분을 마연한 횡단면 장타원형의 간돌도끼(磨製石斧)도 많이 만들어진다. 울진 후포리 매장유적에서 시신과 함께 부장한 수십 점의 간돌도끼는 길이 30㎝ 이상되는 것으로 부장용으로 특별히 재작된 것으로 보인다. 시신과 부장된 의례용의 간돌도끼는 춘천 교동의 예도 있다. 이들 간돌도끼는 가본적으로 나무자루에 직각으로 결박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 된다.
신석기시대에도 간돌도끼가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보편적으로 보다 많이 사용되고 그 종류도 다양하여지는 것은 청동기시대 들어와서이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간돌도끼의 가장 많은 예는 조개날도끼(合刃石斧)라 부르는 조갯날에 단면 타원형의 간돌도끼로서, 무덤유적에서 발견된 예는 거의 없고 그 대부분이 집자리나 패총 등지에서 발견된다. 이들 청동기시대 간돌도끼는 사용방식에 따라서 가로도끼(橫斧)와 세로도끼(縱斧)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가로도끼는 자루와 도끼 날이 평행을 이루는 것이고, 세로도끼는 직교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심지어는 철기시대에까지 인류가 가장 장기간에 걸쳐 사용한 석기로, 굴지, 벌채 등과 수렵, 전투용으로도 사용된 다목적용이다. 신석기시대에도 간돌도끼가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보편적으로 보다 많이 사용되고 그 종류도 다양하여지는 것은 청동기시대 들어와서이다. 청동기시대의 돌도끼는 몸의 단면형태에 따라 원통형·기둥형·사각형으로, 또 날을 세운 방법에 따라 조갯날·한쪽날·양날도끼로 분류한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간돌도끼의 가장 많은 예는 조개날도끼(合刃石斧)라 부르는 조갯날에 단면 타원형의 간돌도끼이다. 이 돌도끼는 전면을 곱게 갈았으며 몸통은 얇은 편이다. 날은 양쪽에서 갈은 조갯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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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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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편 |
한국(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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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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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기능 |
주(住) 생활용품(生活用品) 문방구(文房具) 연(硯) |
장르 |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기타(其他) |
유물번호 |
000017 / 000 |
상세설명 |
[정의]
먹을 가는 데 사용하는 문방구.
[발달과정/역사]
≪고려도경≫에 따르면 "연왈피로(硯曰皮盧)"라 하여 이미 고려 때부터 벼루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보통 돌로 만들지만 와연(瓦硯)·도연(陶硯)·자연(磁硯)·이연(泥硯)·토제연(土製硯)도 있으며, 보석류나 금석류로도 만든다. 이 가운데서도 충청남도 보령의 남포지방에서 나는 남포석(藍浦石)을 가장 으뜸으로 치는데, 먹을 갈 때 매끄러워 조금도 끈적거리지 말아야 하며, 묵지(墨池 : 묵즙을 모으도록 된 오목한 곳으로 硯池라고도 한다.)에 물을 넣어 두어 10일 이상 되어도 마르지 않는 것을 좋은 벼루로 친다. 현재까지 전해 오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은 중국 한대의 것으로서, 중국 본토와 낙랑무덤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이 중 채협총(彩練塚)에서 출토된 벼루는 장방형의 판연(板硯)으로 칠이 된 연대(硯臺)에 고정시킨 것이고, 평안남도 평원의 석암리9호분(石巖里九號墳)에서 출토된 벼루의 경우 둥근 목대(木臺)에 붙여 세 발로 받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묵지가 없는 평평한 것인데, 먹을 개기 위한 연구(硏具, 磨石)가 딸려 출토된다. 묵지가 있는 벼루가 출현한 것은 남북조시대부터인데, 이때는 원형·방형의 벼루가 가장 많다. 당나라 이후에는 풍자연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문방구 애완의 풍조가 유행하면서 기형도 다양해졌다. 도연은 남북조시대부터 사용되었는데, 원형으로 주변이 낮아지거나 홈이 둘러진 것으로, 원대 이래는 많은 제각(蹄脚)이 받치는 형태로 된다. 당대에는 동작대(銅雀臺)의 옛 기와를 가지고 만든 와연이 유행하며, 도제의 풍자연도 생산되었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도제의 원형벼루가 만들어졌으며, 삼국에서 모두 간소한 제각이 달리고 뚜껑이 있는 백족연(百足硯)이 사용되었고, 이와 함께 석제원형벼루도 전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연지(硯池) 외벽과 발에 조각이 된 벼루도 나타났다. 그런데 대체로 석연이 일반화된 것은 고려시대 이후라고 생각되는데, 현재 발굴되는 고려시대 무덤에서는 부장품으로 석제벼루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형태는 장방형을 주축으로 하여 풍자연·금연 등 다양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크기·형태와 장식의 종류가 더욱 다양해져 석연뿐 아니라 자연(磁硯 : 자기로 만든 벼루)도 생산되었다. 우리 나라의 석연재(石硯材)는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데, 무산·위원·평양·장산곶·정선·평창·장단·단양·계룡산·남포·안동·경주·언양·장수·강진 등이 대표적인 산지로 꼽힌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크기는 서당연(書堂硯)처럼 큰 것에서부터 손가락만한 행연(行硯 : 여행용 벼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형태 또한 원형·4각형·6각형·8각형·12각형·타원형에서부터 여러 가지 물건의 모양을 본뜬 구연(龜硯)·연화연·풍자연(風字硯)·태사연(太史硯)·금연(琴硯)·석고연(石鼓硯)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조각문양은 용·학·거북·봉황·포도·매화·난초·국화·대나무·불로초·감·물고기·팔괘(八卦)·십장생(十長生)·소상팔경(瀟湘八景) 등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문자를 돋을새김하거나 오목새김한 것도 있다. 이 벼루는 벼루의 모서리편으로 바닥을 제외한 전 부분을 갈았다. 모서리에서 0.3㎝의 간격을 두고 1조의 선이 있다. 선 안쪽에 초문(草文)으로 보이는 문양이 흐리게 나타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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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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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돌 |
한국(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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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石) 화강암(花崗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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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기능 |
산업/생업(産業/生業) 공업(工業) 석공(石工) 지석(砥石) |
장르 |
기타(其他) 기타(其他) |
유물번호 |
000016 / 000 |
상세설명 |
[정의]
숫돌은 간석기(磨製石器)의 형태를 잡거나 완성된 도구의 날을 세우는데 사용했던 도구이다.
[발달과정/역사]
신석기시대의 돌 연모 제작기술은 갈기수법에 의한 간석기 제작기술의 보급과 발전으로 특징 지워지는데 숫돌은 이러한 기술의 보급을 직접 증명해주는 중요한 도구 가운데 하나이다. 숫돌은 주로 사암과 니암 계통의 돌감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숫돌이 갈아야 하는 대상의 돌감보다 더 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즉 돌감을 갈 때 숫돌도 함께 갈려야하며 이 때 생기는 돌가루가 마찰력을 높여주어 갈아야할 대상이 더 잘 갈리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숫돌의 모양은 장방형(長方形), 원형(圓形), 타원형(?圓形) 등 매우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도구의 제작 과정과 방법에 따라 입자가 거친 숫돌, 중간 숫돌, 그리고 입자가 곱고 미세한 완성용 숫돌로 구분할 수 있는데 만들고자 하는 도구에 따라 숫돌의 용도가 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숫돌의 사용방법은 대개 돌감을 숫돌 위에 올려놓고 위↔아래, 오른쪽↔왼쪽 또는 원운동을 하면서 가는데 일부 작은 돌연모의 완성단계 또는 끝 부분의 날·모를 세울 때에는 돌감 위에 작은 숫돌을 대고 움직여 갈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의 숫돌은 반드시 간석기를 만들기 위해 사용된 것만은 아니다. 이는 일부 숫돌의 윗면에서 발견되는 홈줄자국을 통해서도 알수 있는데 이러한 자국은 치레걸이용 구슬을 만들기 위해 원통형의 옥을 갈았던 흔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숫돌은 집자리 또는 그와 관련된 생활유적에서 대부분 출토되고 있으며 그 존속시기는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가지 지속되었다. 이 숫돌은 전면을 곱게 갈았으며 일부 결실되었다. 두께는 0.8~2.3㎝이며 너비는 2.2~2.9㎝이다. 회백색의 화강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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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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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돌 |
한국(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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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石) 화강암(花崗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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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기능 |
산업/생업(産業/生業) 공업(工業) 석공(石工) 지석(砥石) |
장르 |
기타(其他) 기타(其他) |
유물번호 |
000015 / 000 |
상세설명 |
[정의]
숫돌은 간석기(磨製石器)의 형태를 잡거나 완성된 도구의 날을 세우는데 사용했던 도구이다.
[발달과정/역사]
신석기시대의 돌 연모 제작기술은 갈기수법에 의한 간석기 제작기술의 보급과 발전으로 특징 지워지는데 숫돌은 이러한 기술의 보급을 직접 증명해주는 중요한 도구 가운데 하나이다. 숫돌은 주로 사암과 니암 계통의 돌감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숫돌이 갈아야 하는 대상의 돌감보다 더 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즉 돌감을 갈 때 숫돌도 함께 갈려야하며 이 때 생기는 돌가루가 마찰력을 높여주어 갈아야할 대상이 더 잘 갈리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숫돌의 모양은 장방형(長方形), 원형(圓形), 타원형(?圓形) 등 매우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도구의 제작 과정과 방법에 따라 입자가 거친 숫돌, 중간 숫돌, 그리고 입자가 곱고 미세한 완성용 숫돌로 구분할 수 있는데 만들고자 하는 도구에 따라 숫돌의 용도가 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숫돌의 사용방법은 대개 돌감을 숫돌 위에 올려놓고 위↔아래, 오른쪽↔왼쪽 또는 원운동을 하면서 가는데 일부 작은 돌연모의 완성단계 또는 끝 부분의 날·모를 세울 때에는 돌감 위에 작은 숫돌을 대고 움직여 갈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의 숫돌은 반드시 간석기를 만들기 위해 사용된 것만은 아니다. 이는 일부 숫돌의 윗면에서 발견되는 홈줄자국을 통해서도 알수 있는데 이러한 자국은 치레걸이용 구슬을 만들기 위해 원통형의 옥을 갈았던 흔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숫돌은 집자리 또는 그와 관련된 생활유적에서 대부분 출토되고 있으며 그 존속시기는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가지 지속되었다. 이 숫돌은 앞면과 뒷면만을 곱게 갈았으며 일부 결실되었다. 돌도끼로의 사용도 추정해 볼수 있다. 황색의 화강암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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